영천 여행 단심가의 포은 정몽주 생가 그리고 영천 임고서원

2022. 7. 20. 11:13≪일반 산행지≫/기타(일반 다반사)

 

님 향한 일편단심 포은 정몽주의 생가 및 임고서원에 갔다오다

 

찌그러진 냄비를 버리고 새 냄비에 밥을 해야 한다는 정도전

반대로 찌그러진 냄비를 펴서 밥을 해야 한다는 정몽주 둘중

누구를 선택할 것 인가

 

 

포은 정몽주 임고서원은 위기에 처한 나라의 국운을 바로 세우고자

 죽음으로서 절의를 지킨 시대의 충신 '정몽주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조선명종 8년(1553)에 선생의 고향인 영천 사람들이 건립한 이후 소실과 중건, 정화를 거친 뒤에야

 현재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임고서원 소장전적 및 포은 정몽주 영정이 보물 제1109호, 111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원 앞에는 수령 500년의 은행나무가 우람하게 서있다.

 

고려말의 학자이자 충신이었던 정몽주는 그릇된 기강을 정비하여 국체를 확립하고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여 제반 제도를 재 정비하는 등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바로 세우고자 노력하였다.

이에 반해 이방원은 정도전 등과 함께
아버지 이성계를 추대해 조선왕조를 열고자 하였다.


사냥하다가 낙마하여 드러눕게된 이성계를 병문안 온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서

 이방원은 "하여가"를 읊었다.


이에 답하여 정몽주가 부른 시조가 "단심가"이다.

이방원은 정몽주가 절대로 자기 편이 될 수 없음을 

 확인하고 돌아가는 길인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죽인다.
 


하여가(何如歌) : 이방원

此亦何如彼亦何如(차역하여피역하여) 
 城隍堂後垣頹落亦何如(성황당후원퇴락역하여)
我輩若此爲不死亦何如(아배약차위불사역하여)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 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하여 백년까지 누리리라 

           

 

단심가(丹心歌) : 정몽주

此身死了死了一百番更死了(차신사료사료일백번갱사료)
白骨爲塵土魂魄有無也(백골위진토혼백유무야)
鄕主一片丹心寧有改理歟(향주일편단심유개리여)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칼잡이 이방원은 1367년생이고, 붓잡이 정몽주는
1337년생이니 정몽주보다 이방원이 30년이나 후배다.
그런데 칼잡이 이방원이 붓잡이 정몽주 못지않게 멋진
‘하여가’란 시조를 지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몽주를 만나 회유할 때 활용하려고
이방원 스스로 이 시조를 짓는데 몇날 며칠이나 걸렸고


또 얼마나 오래 다듬고 다듬었을까?

포은 정몽주는 원래 유명한 선비이니 ‘하여가’를 듣고

그 자리에서 즉흥시로 ‘단심가’를 읊은 게 아닐까?

정몽주는 이성계를 문병하고 돌아오다
자기 집 근처 선죽교에서 피살당한 것이다.


원래 이 다리의 이름은 선지교(善地橋)였으나
정몽주가 살해된 뒤 그의 피가 얼룩진 자리에
대나무가 솟아나서
선죽교(善竹橋)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선죽교

실제는 북한의 개성에 있는거 알고 계시죠 북한에서 국보로 보존한다네요

 

 

 

 

 

 

 

포은 유물관

 

 

 

 

임고서원

 

 

 

 

 

 

 

 

설명 참조하시고요

 

 

 

 

 

 

 

 

 

 

 

 

 

 

 

 

 

 

 

 

 

 

 

 

 

 

 

 

 

 

 

 

 

 

 

 

 

 

 

 

 

 

 

 

 

 

 

 

 

 

 

 

 

 

 

 

 

임고서원 관람을 하고 다시 포항 오천읍에 있는 정몽주 생가지로 갑니다

 

 

 

 

 

 

문충동 마을 회관앞을 안내 표시에서 약 500미터만 올라가면
정몽주 생가터 있다고 하네여

 

 

 

 

 

 

 

 

 

500미터 정도 올라오니 생가터 안내표지가 나오네요

생가터라 좀 잘 정돈되어 있는줄 알았는데 향나무 밭으로 되어 있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