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낙동강 전투 최후의 방어선 워커라인(또 다른 시작을 위해서)

2015. 8. 3. 09:57≪일반 산행지≫/훔친 남의 산행기

어느것이 더 바람직한가? 어느것이 더 멋진것인가?

살면서 알아 가야하는 숙제지만 대부분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사회적 관습이나 규범속에

퍼즐 맞추듯 요리조리 살아가는 날들이 더 많은것 같다.

그동안 6,25 격전지 호국산행을 기획 하면서 많은곳을 직접 답사하고 자료를 찾기까지

클럽 회원분들의 후원과 관심이 있었기에 가능 했었고 앞으로도 그럴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가 살면서 결코 잊어서는 안될 몇가지 중에서 6.25전쟁이 포함된다. 더이상 물러설 수 없었던 최후의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고자 목숨을 바친 수많은 국군과 해외 참전 용사들과 어린 학도병

워커장군이 한국을 지키고자 만든 최후의 마지노선 워커라인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영덕-왜관-마산 진동까지

직선거리 240km 낙동강 방어 전선이 형성되기까지 白尺竿頭의 땅은 하루가 멀다하고 남으로 후퇴를 거듭하며

물러 설수 밖에 없었다.

이에 한미 연합은 마지막 배수의진을 친곳이 왜관을 중심으로한 낙동강이다.

낙동강은 남한 제일의 강으로써 백두대간 매봉산에서 부산 몰운대까지 장장 510km을 내 달리고 있으며

그중 6,25전쟁 낙동강 전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인 100km가 조금 넘는다.

그 거리 사이에서 너무나 많은 분들이 전사하였기에 그곳은 숭고한 역사의 땅이며 호국의 땅이다.지금은 4대강이란

이름으로 맑은물 대신 녹색빛의 물이 흐르듯 멈춘듯 그당시의 모든걸 어머니의 깊은 마음처럼 감싸안고 유유히 흐른다.

전쟁 개전 초기 55일만에 나라의 한 모퉁이만 남기고 모두 내준 땅 

백두대간의 峻嶺들 조차도 힘없이 무너진걸 보면 연약할것 같은 강물을 앞에두고 진을 치니,남한 제일의 大河인 낙동강은

 4대강중 제일 맏형으로써 충분한 자질이 있었다.

산길에서도 물과 산을 땔래야 댈수 없는 不可分의 관계로써 山自分水嶺을 앞세우고 있다. 산은 결코 물을 넘을 수 없고,

물 역시 산을 넘을수 없는 원칙이 있다. 물이란 산이 막고 있으면 돌아서 낮은 곳으로 흘러 대하를 지나 바다로 흘러든다.

 

우리가 찾은 낙동강 방어선은 방어에 유리한 이점이 있었지만 동부 산악지대(왜관-영덕) 한국군이

방어한곳은 1차.2차.3차에 걸쳐 수정 될 많큼 7번 국도를 중심으로한  영덕.포항, 기계.안강에서 열세에 놓인다.

그래서 워커라인 코스를 왜관에서 팔공지맥길의 보현산 이후로 어디로 갈것인가.포항 안강으로 갈것인가

영덕으로 갈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어린 학도병이 숨져간 장사 상륙 작전 지역을 택해서 워커라인 320KM 코스를 알리기로 한다.

 

산행날짜 7월 25일부터 약 6일간 135시간 동안 강행군

코스:영덕-동대산-내연산-팔공지맥길-가산-다부동 유학산-328고지-왜관철교 170km

        왜관철교 낙동강 자전거길-강창교-현풍-구지면-유어면 청단고개-개비릿길-남지철교-법수면-처녀뱃사공 노래비

       십이당산-여항산- 인성산-진동리 160km

      총산행 거리:330KM

 

 낙동강 방어 목적상 몇가지 이점

 

1.개전 이래 최초로 이루어진 전투 방어선 이며

2.서쪽 측면 낙동강은 강폭 400-800m으로 형성 되었고

기본 수심 2m-4m 강수면폭 200-400m 형성되어 천연의 방어선 구축

3.낙동강 방어선 안쪽은 거대한 보급창고인 부산으로 부터 대구.포항 영덕.밀양.창녕까지

병참선 발달로 보급과 병력 이동에 유리함

 

 북한의 부산 점령하기 위한 전투 작전 개요 4가지 방안

 

1.남강과 낙동강 합류점(창녕 남지교)을 통해서 마산으로 통과하는 방안

2.낙동강 돌출부(박진교)를 통과하여 영산-밀양에서 철도와 도로를 이용하는 방안

3.경부본도와 5번국도를 따라 대구를 통과하는 방안

4.동해안 도로를 따라 남하하는 방안 

 

고생한 사람은 언제나 옆에 있어 든든하다.

낙동강 방어선 워커라인은 전쟁이 가장 격하게 진행 중이던때 미군이 만든 최후의 방어선이다.

낙동강 방어선이 뚫리면 다음 저지선은 밀양을 중심으로 데이비드 선인데 문제는 이곳 데이비스선은 미군이 한국을

포기하고 전쟁에 참전한 미군을 본토로 후퇴 시키기 위해 설정한 선이다.

긴거리 산행을 앞두고 할수 있을가 보다 누구랑 함께 하느냐 하는 문제가 다가온다.

말없이 늘상 티격태격하는 록수님부터 꼬득이고 그다음은 나와 같이 고생을 가장 많이 한 산너머대장

그리고 전날 합류에 결정하신 정명대장님.

긴거리 산행에서는 아직 검증이 필요했던 정명님 ...걸어보니 진정한 산꾼이였습니다.

긴거리 산행 이제 시작해볼까 합니다.

한가지 덧붙이면 앞으로 이코스는 클럽 차원에서 진행은 하지않고 6,25 전쟁 기간중 이런곳이 있었구나 하는걸 알리기

위함이었으니 6.25전쟁 낙동강 전투에 대해서 잊지 말아 주셨으면 하는 바램으로 6일간 일정으로 다녀온 곳이다.

 

이른아침 포항 버스터미널에서 오스칼 해린님을 만나 영덕군 장사해수욕장으로 이동한다.

푸르름이 좋은 농촌 풍경과 그넘어로 보이기 시작하는 바닷가 일출풍경 이른아침 햇살이 너무 좋은곳이다.

서서쏴 조형물 뒤로 오늘 첫 오름 남산이 지척이다.

 

장사해변은 어린 학도병이 숨져간 호국의 자리이기에 지금은 대규모의 기념관 건립을 하기 위해 공사를 하고 있으며

어린 학생들을 상륙 작전에 실고 오다가 장사 해변 인근에서 태풍으로 좌초된 문산호 복원 공사도 진행 중이다. 

 

 장사상륙작전

 1950년 9월 14일 기척의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위장 상륙작전

  상륙작전에는 성공 했으나 772명중 어린 학도병이 90%  참가

  6일간 중간 지원없이 버팀 상륙작전 도중 어린 학도병 200명 사망

  "학도병들은 대부분 고등학생들로 구성되어 군사훈련을 충분히 받지 못한 상태에서 구국일념으로 전투에 참가한

  탓에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장사 상륙작전 시나리오 "상륙을 할수 있어도 후퇴가 없는 ...후퇴 해봐야 바다 이므로

  인민군은 장사 앞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남산에서 기관총으로 난사를 하였고...

  인천 상륙작전을 하기 위해 인민군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했다. 그래서 장사 상륙작전으로 시선을 돌리고

  인천에 상륙하여 반격에 성공하게 되었다. 장사 상륙작전에 참여한 학도병들은 10대의 학생들로 구성되었다.

  장사 상륙작전은 죽으러 가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나 기꺼이 참여하여 참여자 대부분이 전사 하였다.

  이를 기리기 위해 해마다 장사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상륙작전에 앞서 소규모 해군이 함포사격을 감해하였다.

  대공포를 박살내고, 공군의 기총엄호를 받기 위해서였다. 대공포가 파괴되자, 미8군 예하 무스탕이 장사 상공에 떳다.

  772명의 대원이 1차적으로 상륙을 개시했고 태풍 케지아호의 영향으로 배는 좌초 헤엄치지 못한 어린학도병들 익

  사 했다.조국을 위해 책과 펜을 두고 피 묻은 총을 든 소년들이다.

  정규군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총 쏘고 수류탄 던지는 법만 간단히 배운 학도병이라지만 매섭게

  북한군을 몰아부쳤다. 모래사장은 피로 물들었다. 2차 상륙이 모두 완료되고, 1차 상륙의 병력과 합류하여 북한군

  섬멸에 앞장섰다.. 모래사장을 넘어가는데, 수 백명이 전사했다. 무스탕이 가끔 날아와 기총엄호를 할 때면,

  북한군의 사격이 멈췄는데, 그 때 엎드려 있다가 얼른 뛰쳐나갔다. 끝내 학도병이 장사를 점령하고 이후 몇시간

  동안 포항을 향하는 북한군의 보급로를 끊어놓는데 성공했고, 상륙지점이 동해안이라는 강한 의식을

  심어줌으로서 북한군의 시선을 서해에서 떼어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4시간이 지나고, 서서히 북한군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학도병들은 이를 악물고 탄약을 모두 써가면서까지 적들을 막아냈다.

  그러나 2개 대대병력이 기갑병력과 함께 장사를 덮치자 , 미8군은 즉각 철수 명령을 내렸다.

  이미 139명이 넘는 전사자가 나왔고 생존자 수십명은 동료들을 챙기며 모래사장을 내달렸다.

  이것으로 단 몇 시간동안만 이어진 장사상륙작전은 끝이 났다. 장사상륙작전은 772명의 자원입대한 학도병이

  참전하여 139명의 전사자를 냈고 부상 92명을 포함 수십명이 행방불명 발생

 

  마지막에 철수를 할 때는 철수를 돕기 위해 왔던 수송함이 매우 작았던 터라 1개 소대병력 36명을 태우지 못한 채

  철수 했다고 한다. 자신들을 남겨두고 떠나가는 동료들을 배웅하며,모래사장에 남겨졌던 학도병들은 끝까지

  철수하는 동료들의 안전한 철수를 위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뒤돌아 다시 모래사장 건너편 북한군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내달렸다고 한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고 남겨진 학도병 중 대부분은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어렵게 좌초된 문산호와 해안의 소나무에 밧줄을 연결 하였고 상륙작전에 성공했다  

  상륙한 대원들은 장사리 부근의 적을 섬멸하고 화진리.구계리 봉황산 까지 진출 적의 보급로 차단하는 등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이제 시작인가

폭염속 날씨 라지만 이곳은 바람이 불어 온다.

새벽에 나와서 이곳까지 차량지원해주신 오스카 님께 고마운 마음을 전하며

이제 걷는 기계가 되어 6일간 걸어야 하는길에 바람과 파란하늘과  태극기 그리고 무궁화가 반겨준다.

 

 

영덕 귀신의 집을 지나서 초반부터 잡풀지역을 지나며

몇발짝 움직이니 한여름 땡볓아래 어떻게 걸을까 그생각만 하게 된다. 

 

전에 없던 임도길이 만들어 지고

 

남산 정상에서

이곳 남산은 어린 학도병들에게 기관총 난사를 한곳이기도 하다.

그때는 지옥같은 분위기 였겠지만 오늘은 맑은 하늘아래 조망이 참 좋다.

남산 아래 군부대를 지나는 길에 군인들이 철조망 옆으로 지나가지 못하게 해서 실랑이 벌이다가

6,25 관련 자료 찾으러 간다고 하자 그제서야 조심해서 진행 하란다.

그러고 보니 못가게 하는 군인들이나 꼭 이곳을 지나야 하는 우리나 ...

 

동대산

산행기를 어떻게 쓸까 하다보니 그당시에 있었던 전쟁 초기를 간단하게 요약해서 써야 할것 같아

그 내용들을 적어 볼까 한다.

 

 

50년 6월 25일 일요일 맑음

북한군 새벽 4시 남침

국한군 1.2.3.4.5.12사단 제 105전차여단 휴전선 11개지점에서 침공

50년 6월 26일 월요일 맑음 전쟁 2일째

북한기 2대 김포 비행장,여의도 비행장 폭격

 27일 맑음 3일째

북한군 소양강 건넘

정부 대전으로 수도 이전

28일 흐림

북한군 이른 아침 서울시내에 진입 .홍천 점령

29일 흐림

맥아더 원수 한강 방어선 시찰,

30일 미군 전방 지휘소 수휘에서 대전으로 이전

500명의 학도병 수원에서 비상 조직

32개국 유엔안보리 한국 무력 원조 지지 표명

7월2일 맑음]

북한군 용인 점령,

7월 3일 북한군 한강 도하

미국.영국함대 동서 해안에서 작전 수행

7월5일 수요일 비

미 포병 북한군 전차대와 오전 11시에 서부전선에서 최초 교전

7월 6일 흐리다 맑음

북한군 오후 6시 평택 점령

7월 7일 맑음

미 제 24사단 평택부근37도선에 방어진지 구축

7월 8일 흐림.비

미군의 공격으로 북한군 천안으로 후퇴

북한군 2개사단 원주로 집결

7월 9일 비

유엔군 전투 배치 완료

북한군 주력 부대 대전에 주둔

워커장군 북한군의 전투능력 높게 평가

7월 10일 맑음

미 제25사단 부산 상륙

유엔 공군기 300대 한국 서부지역 맹공격

7월 11일 맑음

유엔군 충주 단양 탈환

7월 12일 흐리다가 비

대전지구 전투에서 유엔군 금강 남쪽으로 후퇴

7월 13일 흐림.비

엔사령부 워커장군 주한 미8군 사령관 임명

북한군 청주 점령

7월 14일 흐림

군군 작전권 유엔군 사령관에 넘김

7월 15일 흐림

국군 제2군단 상주에서 창설

북한군 금강 남안까지 진출

7월 16일 흐리다가 맑음

북한군 문경 점령

7월 17일 흐리다 맑음

유엔기 매일 23대 이상 출격

북한군 일부 영양까지 진출

7월 18일 화요일 맑음

7월 19일 비

북한군 이리.영덕 점령

7월 20일 흐림 비

유엔군 대전 비행장에서 북한군 전차 7대 격파

국한군 김일성 8월 15일까지 부산 점령 하달

7월 21일 흐리고 비

대전 북방에서 북한군과 치열한 교전 국군 예천 탈환

미제 24사단 대전 방어선으로 후퇴

7월 22일 토요일 비

국군 영덕 탈환.미제1기병사단 제7연대 포항 상륙

북한군 제 6사단 정읍 정령

7월 23일 일요일 흐리다 맑음

대전 영동지구에서 북한군과 격전

북한군 광주 점령

7월 24일 월요일 맑음

북한군 영동으로 진격 미제 25사단 압박

7월 25일 맑음

한군 수도사단 기갑연대 청송에서 접전

북한군 목포 진입하고 대전 영동의 미 방어선 돌파

7월 26일 맑음

미 제 24사단 합천에 사령부 설치

북한군 6사단 하동으로 침입

7월 27일 흐림

미군 영동 터널에서 북한군 대부대 궤멸

북한군 제4사단 안의 점령

북한군 3개사단 영동 동쪽에서 대공세

7월 28일 금요일 비

유엔군 영동에서 대반격 실시

황간지구 전투에서 미1기병사단 북한군 저지 성공

7월29일 토요일 비

워커중장 미 제 25사단에 상주 방어선 사수 명령

 

6월부터 7월 말까지 전쟁 일지를 살펴 보고

간략하게 써봄 이글을 읽고 많은 도움이 되셨기를 바래본다.

 

 

장사해수욕장에서 이곳까지 그리 어렵지 않은 산길이다.

해발 0 에서 시작하는 많큼 힘든 길이지만 큰 오름없이 오를수 있는 구간이기도 하고

앞서간 두분은 어디로 갔는지

느낌에 알바를 한것 같은데 한참 따라가도 보이지 앟는다.

 

향로봉 근처에서 포항의 태관님 내외분을 만나서 인사를 나누고 태관님 배낭에 든것 보두 강탈한다.

두분 만나서 반가웠구요

태관님이 향로봉에서 동강 할미님을 만났다고 해서 전화를 드려보니 불통지역이다.

걸음을 빨리해서 정상에 가보지만 ...

향로봉 정상에서 산너머.록수님께 연락하니 갈림길이 많아 한따까리(알바)한다는 연락이다.

 

 

대전 충일 산악회분들

건내주신 참외 잘 먹었습니다.

 

향로봉 아래서 두분 기다리는 동안 누워 하늘 구경을 하니 날파리와 모기가 극성이다.

30분 정도 기다리니 어디가서 한따까리 고생하고 오는 두분과 다시 만난다

  

인간 포터 상록수님

배낭 무게 20kg 넘을것 같다.

대단 대단

그외 나머지분들도 무지원이라 엄청나게 싸서 오셨다.

 

정명 대장님과 먼저 진행 하면서 오른 매봉

상록수님 무박 최장 거리 300km 이번이 3번째

산너머님 무박 최장 거리 200km

두분중에 산너머님은 저와 같이 산행 하면서 산전 수전 다격은 배테랑 산꾼이고

상록수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산꾼이고

정명님 대간 끝나고 정맥산행 하시지만 아직 긴거리의 산행을 안하셨기에 다소 걱정이다.

이번 산길 끝나고 나면 강한 클럽의 일원으로 성장 하실것 같기에 기대가 큰분

 

매봉산 인증 담고

 

경북 수목원 뒤로 지나온 매봉산이 지척이다.

 

수목원안의 매점

우동.햇반을 시키고

계란.자두.아이스크림 먹을수 있는건 모두 사서 셋팅한다.

포항의 나그네님 회사 쉬는날이라 얼굴 볼겸해서 수박이나 한통 들고 오신단다.

빨리 가야지...

  

수목원에서 일광욕겸 아스팔트길로 잠시 진행

 

잠시 짧은 오르막 오르니 괘령산이다.

헬기장은 온통 저푸른 초원위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반가운 풀밭 내리쬐는 태양아래 잠시 누워 땀을 말리는 일광욕을 하니 정명 대장님이 올라오신다.

 

풀밭을 지나고

 

인증담고

 

비학지맥길의 감시초소

 

멀리 이리재와 운제산 봉좌산,도덕산이 나열된다.

그러고 보니 이 일대의 산들은 모두가 6,25 격전지며 전쟁 자료 찾느라 답사 하면서 찾아가본 산들이다.

 

나그네님께서 지원을 오셨다.

세수 겸 등목 하라고 물도 떠 오시고

포항 물회.음료수

고마운분 요즘은 산삼 케러 다니신다고 바쁘셔 장거리 산행은 뒤전이다.

무지원이라 얼굴만 보고 가라 했는데 이렇듯 준비해 오시니 너무 고맙다.

 

 

내일 저녁 무렵까지 지원없이 가야한다.

이것 저것 챙길수 있는건 몽땅 다시 챙겨 넣고

콜라 한병 더 목구멍으로 흘러 보내니 짜릿함이야 말로.

 

인증 담고

야간에 조금 추울것 같아 나그네님께 옷하나 빌려서 간다.

나그네님 감사 나중에 포항가면 물회...

 

가사령 도착

이제 첫 야간이다. 다시 준비

 

가사봉 낙동 정맥과 팔공지맥길 분기점

가사령에서 이곳까지 땀 한바가지 흘리고 나서야 도착한다.

바람이 어디로 간건지 바람이 전혀 없다.

 

록수님 배낭이 너무 무거워 베지밀 큰것 한통 꺼내 서로 나눠 마시고

잠시 숨 고르기 하니 뱃속이 출렁 출렁

뱃속에 든것 꺼내 마실 있다면 좋으련만...

하긴 오줌도 있으니 수돗꼭지 틀기 마련이다.

나중에 정명 대장님께 오줌 한번 먹어 보라 권하니 싫으시다네

짭쪼름하니 맛만 좋구만

산길은 어느덧 팔공지맥과 구암지맥 갈림길이다.

 

 구암산 전투

  전쟁이 한참이던 50년 7월 10-15일까지

  7월11일 동해안의 춘양방면에서는 게릴라부대 300명이 울진방면으로 이동중에 있었고 남쪽 10km 지점에서도

  적 제 5사단 예하부대 300명이 전차부대와 함께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한편 구암산을 거점으로 출몰하던 게릴라부대의 일부는 동일 03:00 구암산 남쪽 죽장면 감곡리로 이동하여

  집결하였는데, 이들은 경주와 포항방면으로 진출을 기도하면서 죽장면과 기계면의 각지에 출몰하여 부녀자와

  양곡, 농우 등을 약탈하여 갔다. 
  이 게릴라부대는 보현산을 주된 거점으로 하여 아군과 대치하여 오다가 북한군이 대거 남침하여 오자 이에

  가세하여 후방교란에 열을 올렸다.
  포항경비대에서는 이들을 격멸하기 위하여 17:00에 용호대(대장 중위 정창룡)를 안강지구로 출동시켰다가

  1개중대로 추산되는 적들이 영천군 구룡산으로 남하하여 잠입한 것을 탐지하고 12일 16:30에 경주를 지나

  도유동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1개 분대의 척후대를 파견하여 적정을 관찰하였는데, 적들은 인근 마을에서

  노획하여온 가축소리 때문에 그들의 위치를 노출하고 말았다.
  아군 척후대는 심산에서 울려나오는 송아지 소리를 듣고 적들이 숨어있는 위치를 확인한 다음 본대로 돌아왔다.
  도유동 본대에서 공격계획을 세우고 밤을 세운 다음날인 13일 04:00를 기하여 구암산 중복에 있는 적진에

  일제히 사격을 가하였다. 아직 잠에 취해있던 그들은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고 분산도주하였는데, 2시간에 걸친

  추격으로 8명을 사살하고 30명의 포로를 잡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부상당한 듯한 적 30명과 나머지 병력은 청도방면으로 퇴각하였는데, 아군 육전대는 이 전투에서 1명의

  부상자도 없이 13:00 포항으로 귀대하였다.
  14일에도 산악을 타고 죽장방면으로 남하하는 적을 저지하기 위하여 죽장면 입암동으로 출동하였던 육전대는

  적을 추격하던중 15일 새벽에는 비학산 중복에 도착하여 진지를 구축하는 한편 정찰대원 3명을 침투시켜

  100여명의 적들이 잠복하고 있음을 탐지하였다.
  이때 포항경비대에서는 제3중대(중대장 소위 박승도)를 파견하여 옴과 동시에 용호대장 지휘하에 편입되었는데

  이날은 이미 날이 저물어 교전없이 용기국민학교로 동본부를 이동하였다.
  다음날 06:00 1차로 1개 소대의 육전대가 출동하였으나 적들은 죽장 북쪽 산악지대로 도피하기 시작하므로

  가사리 방면으로 적을 추격하였다.
  산악지대로 도피한 적들은 점차 병력을 증가하여 500여명이 잠복중이었는데 17일 새벽 04:30 그들은 합덕리

  방향으로 하산하고 있었다. 한편 정자리에서도 400여명의 적들이 출현하였다는 적보가 들어왔다.
  이 적들은 산맥을 타고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후방교란을 시도하려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합덕리 고지 일대와 정자리에 집결한 적들을 격멸하기 위하여 해군 육전대는 정찰병력 40명과 함께 포위작전을

  전개하였다. 군·경 합동부대는 전면과 좌우의 3면으로부터 적을 포위한 다음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17일 14:30부터 공격이 개시되었는데 제1소대가 이미 구축해놓은 중화기로 적의 정면에 사격을 가하자 적들은

  뒤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이 적들은 정규부대가 아닌 게릴라 집단인 바 무기도 빈약하였으며 일부 포로들은 칼, 도끼등을 무기로 소지한

  자도 있었다.
  경찰 1개 소대를 좌우에 경계배치한 다음 육전대 제1중대의 3개 소대가 계곡을 따라 공격하였다.
  이 공격에서 제1중대의 1개 소대는 중화기로 적의 우측 정면에 공격을 가하고 제2소대는 적의 좌측 최고봉을

  급습 점령하는 한편 적전 최단거리인 500m 소고지를 확보하였다. 한편 제2중대의 1소대는 좌우에서 엄호를

  받으며 적진정면을 공격하였으며 도주하는 적들을 추격하였다.
  7시간에 걸친 격전으로 우리 육전대는 21:30에 적의 최고진지인 807고지(구암산)을 점령하였던 바 동고지

  일대에는 적들의 시체와 버리고 간 취사기구만이 남아 있었다.

 

조각난 반달 그리고 맑은 별들

이름모를 풀벌레 소리 그리고 반딧불이의 아름다운 비행

네사람은 그렇게 가시밭으로 사라진다.

가끔 풀벌레 소리와 함께 소쩍새 소리가 너무 처량하게 들린다.

송이골 임도에서 다 같이 누워 하늘을 보니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있고

그 사이에 제우스의 백조가 감시병 노릇을 한다.

흐르던 땀은 어느새 멈추고 차가운 한기가 올라와 누워 있기가 불편하다 그리고 뭔놈의 모기가

그렇게 극성인지 모기밥 주다가 일어선다. 에프킬라 가지고 올걸 그랬나

한여름밤의 꿈이 이런것인가.

잠을 잔듯한데 머리속이 어지러우니 안잔듯하기도 하고

 

전에 없던 벌목지대 잡목이 대단하고 잡풀은 정신 차리지 못하게 앞을 막는다.

선두는 길찾기에 최선을 다하고

옷재 지나 산불 감시초소봉에 올라 잠시 쉬어 갈까 하고 정명 대장님과 함께 이슬에 젖은 커다란 판넬을 뒤집는 순간

독사 10마리가 그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다. 

아이고 무서라.

잠시후에 도착한 산너머 대장님께 독사 이야기를 하니 판넬 위에 올라가 쿵쿵 밟고

죽은건지 살은건지 확인은 안 해봐서 모르나 판넬 밑에서 반 골빙 들었을것 같다.

 

꼭두방재

이른아침이라 아직 문은 닫혀 있다.

 

 

각자 가지고 온 라면을 꺼내서

4천원 주고 산 양은 냄비

종환님께서 보내주신 손가락 만한 버너

종환님께서 보내주신 작은 버너( 무게 20g)화력이 너무 좋아서 라면 4개 금방 끓일수 있었습니다.  

종환님표 버너 가격은 미상이나 꼭 사서 가지고 다녀 보시기 바랍니다.

강력 추천 

이번 산행길 기획 하면서 무지원이다 보니 배낭 무게로 신경 쓰였는데

라면에 누룽지 배불리? 먹고 다시 출발

 

산행 이틀째 아침부터 무지하게 덥다.

잠시 바람부는 곳에 앉아 쉬고

오늘은 보현산을 넘어야 하는데 그길이 장난 아니다.

 

통정대부 성안조씨 무덤

 

베틀봉에서 정명님.

베틀봉 4번째 올라 처음으로 조망 구경해 보는 산이다.

야간 두번

주간 한번은 비와 안개로

오늘 처음보니 산 좋으네

 

가야할 면봉과 보현이 우람하게 다가온다.

 

산너머님

록수님이 배낭무게로 늦어 기다리시고 우리는 영천에서 얼굴 보러 오시는 정다운님을 만나러 먼저 진행 하기로 하고

걸음을 빨리 해 본다.

 

면봉산 오르기전 임도길에서

오르막 3km란다.

오르막이 이정도는 되어야 제대로 즐길수 있지

 

오르막은 좋고

햇살이 대단하다.

머리가 버껴질판이니,뒤에 오시는 두분 기다리다가 삶아 질것 같아 보현으로 이동한다.

 

면봉에서 본 보현

정상 아래 또다른 정상석에서 우측으로 가야하는데

등로가 엉망이라 직진 좋은길 된비비알 급내리막길로 내려오니 알바다

계곡으로 다시 올라가 안부에 도착한다.

 

보현산에 지원 오신 영천의 정다운님.

저희 때문에 일부러 이곳까지 마중 오신분

많이 기다리게 해서 죄송했구요

돼지볶음 잘 먹고 미역 냉국에 시원한 물과 콜라 얼음물 고마 웠습니다.

 

밥 값은 해야 하니 다시 땡볕속으로

 

보현산 정상은 공사 문제로 전면 출입금지

옆으로 난 나무 테크 계단을 이용해서 시루봉으로 향한다.

 

 보현산 전투

  보현산 전투는 50년 7월부터 9월 초까지 보현산을 중심으로 한 산악지대에서 전개된 비정규전 및정규전 전투였다.

  북한군은 남침과정에서 정규전을 실시하는 한편 유격부대를 침투시켜 그들로 하여금 남한에 있는 좌익세력과 합세,

  후방지역을 교란하고 주민을 선동하면서 민중 봉기를 유도하는 전략을 시도했다.

  이를 위해 특수훈련을 받은 북한군 제766부대가 동해안에 상륙한 후 보현산 일대로 진출하면서 유격활동을 펼치게

  됐다. 아군은 최초 경찰병력을 동원해 적 유격대 소탕작전을 벌였으나 경찰만으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으므로 7월 하순부터 공병단과 유격대를 투입했다.

  북한군 제 766부대가 투입됨으로 비정규전 형식으로 전개하기 시작한 보현산 전투는 이곳의 중요성이 인정되면서

  정규전으로 점차 확대됐다. 즉 국군은 제8사단을 이곳에 투입했고 북한군은 다부동 전방에 있던 제 15사단을

  이곳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이 지역에서 결정적인 활로를 개척하려고 했던 반면 아군은

  이지역과 이곳으로부터 남쪽은 접근로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따라서 적 제 15사단은 운주산과 봉화봉 사이에 형성된 공백지대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죽장~자양~영천 축선상에

  전투력을 집중 투입하고 9월 2일 저녁 공격을 개시해 돌파구를 형성해 영천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로써 아군 제8사단은 결국 보현산을 포기하고 영천 북쪽에서 적 제15사단을 저지하게 되었다.

  이 전투로 적은 동부전선의 진출이 지연되어 왜관 북방에 위치하고 있던 적 제15사단을 청송지역으로

  이동시켜 전투력을 보강하게 하는 한편 목표로 한 8월 l5일까지 대구를 점령하는데 실패함으로써

  전반적인 전쟁목표 달성에 차질을 가져왔다. 반면에 아군은 부대를 재편하고 정리하는 한편 보현산과 기계지역

  정면에 새로운 주저항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획득하였다.한편 보현산 일대에 이동해 주저항선을

  형성한 제8사단은 험준한 지세를 적극 활용해 22일간 우세한 전력의 적 제8사단과 제776부대를 억류하고

  견제하는데 성공하였다.하지만 신편으로 인한 훈련부족과 병력 및 장비의 열세에 따른 전력 차는 결국 국군

  제8사단을 기룡산 방어선으로 철수하게 작용한 요인이었다.8월 15일 투입함으로써 이후 적 제2군단은 

  예하의 제8사단을 증원하기 위해 제15사단을 투입함으로써 국군 제8사단은 방어에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보현산지구전투는 영천지구 전투를 위한 전초전으로서,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기 위한 준비단계의 전투였다.

  다시 말해,적이 총력을 집중한 9월공세로 9월 공세로 부득이 제8사단 예하 제15연대와 제21연대,

 그리고 제7사단 제5연대와 독립 제 1, 제2유격대대,강원경찰대대 등이 9월 4일을 기해 인접부대와 연결 작전을

  위해 다음 진지로 이동하였다.이로써 국군 제8사단은 모든 병력을 집중 운용하는 것이 가능해짐에 따라

  영천 일대에서 결전을 전개할 수 있었다.

 

 

내일 도착하게 될 팔공산이 지척이다.우측으로 길게 이어지는 곳은 개인 사유지다.

세월호의 유병헌 땅이고 싯가는 대략 25억원이란다.

철조망 갓길로 등로는 희미하고 바람없는 산길이 이어진다.

 

이제 어느산에서 다시 또 기나긴 장거리를 같이 할수 있을지

정명 대장님 앞으로 지맥길로 가셔야 하고

너머 대장님 무한도전 클럽을 이끌어야 하고

록수님 바람 같은 분이라 어디로 갈지 미지수지만 정맥길로 가실것 같다.

각자가 완전 다른 성향의 성격이라 언젠가 다시 이러한 비상 소집산행에 오실지

오시면 저야 좋고 

 

잠시 쉬는 동안 록수님은 먼저 출발 하시고

그뒤로 너머 대장님 출발

그다음 정명.저 같이 출발

노귀재에서 휴식하고 물품 사서 진행 한다.

 

얼마전에 오른 석심산 다시보니 반갑구만

 

수기령 도착 덥다더워

밤산행 오늘도 밤하늘이 곱다.

어제 보다 조금 더 커진듯한 반달이 유단히 고와 보인다.

어제밤 송이골에서 울던 소썩새는 아닐테니만 소쩍새 울음은 언제나 고향 생각만 나게 한다.

소쩍 소쩍!~~

 

화산 정상

긴밤이 지나고 나서야 도착한 화산은 육군 3사관 학교 유격장이 있었지만

지금은 경산의 특공부대가 관리 하는곳이다.

 

     화산 전투

  화산전투도 칠곡 다부동 전투에 못지않은 치열한 격전이었다. 화산(828m)은 군위군 고로면과 영천시 신령면 경계에서

  조림산과 마주하고 있다. 국군 제6사단은 다부동 전투에서 퇴각한 북한군 일부와 낙동강을 따라 군위 우보에서

  영천 신령 쪽으로 진격하는 북한군 제8사단을 격퇴하기 위해 맞섰다.

  이 무렵 대구에 있던 임시정부는 부산으로 옮겨가던 시기였다.

  영천을 사수하는 신녕전투를 비롯해 최후의 보루였던 대구를 사수하기 위한 전투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화산 정상 부근은 모두가 유해 발굴지역이라 해도 된다.

  고추장과 주먹밥 한덩이 지원도 끊어지는 전쟁속에 중대병력이 소대병력으로 줄어듬

  북한군의 피해도 막대함

  [교전내용]

  화산828m은 지형적인 특성상 넓은 들판지역의 평지같은 곳이다

  국군은 주간공격에 많은 전사자가 나오자 야간을 이용한 기습공격을 감행하고

  중대원들은 주먹밥에 고추장 찍어 먹고 화산으로 침투 

  북한군 동쪽진지, 국군은 서쪽진지 서로가 기습공격을 감행하다 보니  서로의 진지가 뒤바뀌는  일이 많았다.

  혼전과 혼전, 전투와 전투속에 진지가 바뀌고 또 바뀌니 식사를 운반해오던 한국청년단원이 적에게 사살되거나

  붙들리니 주먹밥과 고추장 한숟갈 조차도 지원이 끊어져 버렸다 .

  지원은 끊어 졌지만 실탄은 부족함이 없었다.수없이 쓰러진 전사자의 실탄과 부상자들의 실탄이 보급의 원천이

  되었으니...

  MBC 드라마 2010년 소지섭의 "로드 넘버원" 촬영 배경이 된곳

  신녕, 갑령, 화산지구 전투는 1950년 8월 13일부터 9월 14일까지 33일간의 피말리는 전쟁을 한 격전지로

  신녕지구전투는 갑령, 화산, 조림산 지구전투와 더불어 대구 동북부 방면 방어 작전 중 하나며, 낙동강을 건너게

  된 북한군 제 8사단은 아군 제6사단과 교전하면서 신녕 북쪽으로 남침했고, 북한군 12사단과 15사단은 보현산지구로

  진출했다

 

 

떨어진 준희 선배님 목간판 

긴급 보수반 4명 편성해서 보수 공사에 들어가고

일당은 준희님께 받기로 합니다.

8월 대간 졸업때 오시면 몇만원은 받아야...

 

화산에서 내려오면 만나는 묵은밭

계란꽃이 반긴다.

 

묵은밭으로 이슬이 많아 셋팅한부분

태풍이 온다고 해서 우중산행 준비를 철저히 해서 오시분들이지만 저야 늘 한결같은 차림이다.

각자 배낭안에 등산화 별도로 준비

저는 비가 오던지 말던지 크게 관심 없고 비오면 집으로  갈 생각만

 

마루금상에 고랭지 자두밭이라 짐승 출입금지 철판으로 막아 두었다.

임도로 갑시다.

 

화산 감자골 마을 임도길

 

 

화산 서봉

잡풀이 대단하다

산길이 이정도 되어야 노출로 드러난 허벅지가 좀 따가운 산길이 되지

 

좋고

 

반바지라서 더욱더 좋고

 

멀리 조림산이다.

산세가 독립봉인데 정상에서 조망은 대단하고

올라가면 아주 곡소리나는 경사진 산이다.

작아도 당돌한 산

화산부터 조림산 그리고 갑티재까지 치열한 교전 장소이기에 지나는 길에 전사자 유해 발굴한곳이 많다.

 

갑티재(갑령)

북한군이 영천이나 신령을 가려면 이길을 지나야 하기에 국군은 이곳 갑티재에서 방어 

군위군에서 이곳 갑티재에 6,25전쟁 갑령 전투 전적비 건립을 위해서 땅을 매입 했으며

조만간에 공사를 시작 한다고 한다.

 

 조림산,갑령 전투

 주위 조망이 좋아 사방 수십km가 관측 되어 전략적으로 매우 좋은위치

  [교전 개요]

  조림산은 8부능선 부터 상당한 급경사의 오름이다. 조림산 정상은 적의 수중에 들어 가있는 상태이며

  8월 말부터 북한군 제 8사단은 인접 북한군 제 13사단 및 제 15사단과 서로 호응하면서 신녕지구를 돌파한

  다음 대구 방면으로 진출하여 보려고 최후의 총공세를 다짐하였던 것인데 이 적을 맞이한 아군 제 6사단은 장병

  모두가 일심동체가 되어 대구 외곽선을 끝내 사수하는데 성공하여 적의 야욕을 드디어 분쇄하고 말았다.
  9월 15일부터 반격에 들어간 아군은 낙동강 선의 모든 전선에서 끝까지 저항하고 있던 적에 일대 타격을 가하면서

  일로 북진반격을 재촉하였다. 원래 제 6사단의 신령 지구 싸움은 대구를 우회공격하려는 북한군 제 8사단에게

  섬멸적인 타격을 가하여 그 전투 능력을 빼앗고 그 사기를 극도로 저하시키고 말았다

  아군:약 8천 5백명

  적군:약6천 500명

  1950년 8월 13일부터 9월 20일까지 국군 6사단과 북한군 8사단이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던 전적지로 당시 국군은

  적 3천800여명을 사살하고 적전차 21대, 화포 14문을 파괴하는 등 수세적 전황을 공세적으로 전환시킨 곳이다.

 

 

갑티재에서 아침겸 점심 겸해서 라면 끓인다.

얼마전에 이곳을 우연히 지나는길에 물 몇병 가져다 둔곳이며

그늘없는 곳이라 땡볕 아래서 잠시 쉬다가 다음 산길로 오른다.

동네 산길이라 등로도 그렇지만 풀밭을 지날때는 열기가 대단하다.

 

치산마을 고갯길에서 잠시쉬고

 

시루봉 오름길

아랫마을은 파공산 뒷편 치산마을

자주고개 옆으로 새로운 도로가 진행 중이다.

가운데 정면은 의성의 선암산이고 우측으로 지나온 화산

조림산과 옥녀봉이 고개를 내민다.

 

밧줄구간

 

시루봉에서

 

시루봉에서 올라와 정상으로 향하는 아스팔트길 옆 그늘진곳에 모두가 누워 휴식을 취한다.

휴식끝 차도로 오르는길에 지나가는 경찰관이 지나가면서 수고 하란다.

정상은 군부대가 자리하기에 그동안 철조망 옆으로 겨우 겨우 지났는데

지금은 등산객 편의로 좋은 나무 테크로 깔고 개방된곳이다.

 

워커라인 최고점 팔공산 비로봉이다.

힘든산길은 여기까지 이지만 낙동강 자전거 길은 글쎄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한티재에 저녁밥 먹으러 갑시다.

 

지나온 서봉 방향

 

가야할 파계봉 방향

 

정상 군부대와 동봉 방향

 

부부 소나무 인근에서 지원나온 고향친구 대진이를 만나서 같이 진행

산에서는 삐돌이 록수님

산 아래서는 꼬장 꼬장 대진이

나와는 철친이면서도 늘 티격태격하는 사이다.

원수 같은 사이

한겨울에 맨홀 뚜껑속으로 빠지면 추울까 뚜껑 덥어 주는 사이 정도는 되는것 같다. 

 

밥 한끼 해결할 수 있는 한티재 휴게소

대구와 군위 부계로 넘어 가는 고갯마루다.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렌턴 꺼내들고 야간 작업 준비를 한다.

배낭안에 든 운동화와 냄비 가스통은 버리고

 

한티재부터 이곳 가산을 지나 다부동 소야 고개까지 최근 몇년간 국군 전사자 유해발굴을 한곳이다.

지나는 길에 수많은 국군 유해 발굴지역을 지나니 가산 인근의 가산성터 복원 공사로 등로가 말끔해졌다.

가산바위에서 맑고 깨끗한 피로 모기 밥 주고 잡목과 잡풀 사이로 산길 이어 간다.

 

     팔공산.가산전투

  1950년 8월 초부터 왜관-다부동 지역에서 대구 공략을 목표로 공격을 계속하던 북한군 제2군단은 8월 말에 이르러

  대구를 점령하기 위해 험준한 산악지대로 침투하여 우회공격하라는 지시를 맡았다. 이에 북한군 제2군단은 효령 일대

  에서 다부동으로 남하 중인 북한군 제1사단을 가산-도덕산과 대율동 - 팔공산선으로 진출시켜 그 동쪽의 북한군제

  8사단과 협동으로 대구 외곽으로 진출하고자 기도하였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은 다부동 지구에서 작전 중인 국군 제1

  사단의 방어지역을 미 제1기병사단에 인계시킨 다음 국군 제 6사단의 좌측을 담당하게 하여 국군 제2군단의 방어정면

  을 소시켜 남침하는 적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이에 제1사단은 다부동 전선의 동쪽으로 이동하여 국군 제 6사단 지역

  의 부와 제 5연대 및 기갑연대가 담당하고 있던 팔공산과 가산 지역에 대한 방어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국군 제1사단은 새로운 방어지역인수를 위해 8월 30일에 부대를 이동시켰다. 

  육군본부는 제 1단은 미 제1기병사단과 현 담당지구 교대완료 후 즉시 신 담당지구로 이동하여 2개 연대로서 동 지구를

  담당하라고 명령하였고 이에 제 2군단도 작명을 통해 제 1사단은 1950년 8월 30일 12시까지 현 진지를

  미 제1기병사단과 교대 후 31일 19시까지 제7연대, 제5연대, 기갑연대와 교대하여 적의 남진 및 동남진을 저지하고

  이를 진전에서 포착 섬멸하라고 명령하였다. 국군 제 1사단은 8월 31일 제6사단 지역인 신녕 부근으로

  이동한 후 사단사령부를 신단동에 설치하였다

  제11연대와 제 12연대는 제5연대와 기갑연대 그리고 제7연대의 방어진지를 인수할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558고지와 527고지 그리고 655고지가 30일 밤부터 시작된 북한군의 압력으로 점령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제 11연대는 이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제 5연대 및 기갑연대와 협동으로 이날 13시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한편 제 12연대는 제 7연대의 방어지역을 계획대로 인수하여 전선을 유지하게 되었다. 제 7연대는 제 2군단작명에

  의해 신녕으로 이동한 후 사단예비가 되었다. 9월1일 기갑연대는 제11연대 제2대대의 지원을 받아 558고지를 공격하여

  11시에 이를 탈환하여 제11연대 제2대대에 인계하고 신녕으로 이동하였다., 제 5연대 제2대대는 이날 12시에 655고지

  를 공격하여 완강히 저항하는 적 2개 소대 병력을 격퇴한 후 점령하였다. 제 5연대 제2대대는 다시 527고지를 공격하였

  으나 실패하자 우선 655고지만을 제 11연대 제 3대대에 인계하였다. 9월 2일 제 11연대 제 1대대는 전날 진지를 인수받

  았으나 북한군의 야간 기습공격을 받고 이날 2시에 381고지에서 318고지로 이동하였다. 이로 인해 우측에 배치되었던

  제 12연대 제 1대대가 적의 위협을 받게 되었으나 예비인 제 2대대의 증원을 받아 이를 격퇴하였다.

  한편 제5연대 제2대대는 제 11연대 제3대대의 화력지원을 받아 527고지를 3시에 공격하여 11시에 이를 점령하였다. 

  제5연대 제 2대대는 14시에 527고지를 제11연대 제3대대에 인계한 후 대구로 이동하였다.

  9월 3일 제 11연대는 4시부터 북한군의 공격을 받고 제 2대대가 538고지 남쪽에서 적 2개 대대의 공격을 저지하였으나

  이를 막아내지 못하고 14시에 538고지로 이동하게 되었다. 제 3대대는 655고지에서 피아간에 서로 탐색전만 전개하고

  교전으로는 연결되지 않았다. 제 1대대는 318고지 동남쪽에서 적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하고

  원진지인 318고지로 다시 복귀하였다. 제12연대 정면에서는 제 2대대가 침입해 온 적을 격퇴하였으며

  제1대대는 구미동 부근에서, 제 3대대는 제 1사단과 제 6 사단의 전투지경선 변경에 따라 제 2연대로부터

  인수한 제370고지를 점령한 후 진지보강 작업을 실시하였다. 9월4일 제12연대 제1대대는 제2대대에게 전지를

  인계한 후 연대지휘소로 이동하여 집결하였다.

  1950년 9월 5일 중부전선의 제 8사단전선이 돌파되면서 북한군 제 15사단이 영천을 점령하게 되었다.

  이에 제1사단은 9월 5일 밤 전반적으로 전선을 조정하고 6일 오전에 새로운 방어선을 점령하였다.

  제 15연대 제 1대대는 사단의 좌측부대로서 538고지 북쪽 능선을 점령하여 미 제1기병사단과 연결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제 15연대 제 3대대는 384고지 좌측 전방에, 제2대대는 대율동 남쪽 능선을 점령하였다.

  제 11연대 제1대대는 836고지인 파계재 일대의 주요지점에 배치되었고 제2대대와 제3대대는 군단예비가 되어

  신단동으로 이동하였다. 제 12연대 제2대대는 573고지에서 329고지 사이에, 제 3대대는 388고지 일대를 점령하였다.

  이 날 북한군 제1사단은 대구에 이르는 최단 접근로에 주력을 투입해 국군 제1사단을 돌파하고자 기도하였다.

  이에 따라 북한군 제1사단의 일부병력이 2시 야음을 이용하여 583고지로 침투하여 가산 부근의 적과 합세하여

  중리를 향해 남진하였다, 그런데 이날 아침 중리에 도착한 제15연대 제1대대는 남진하고 있는 북한군과 불시에

  조우하였으나 과감한 공격으로 이를 격퇴한 후 583고지를 계획대로 점령하였다.

  이 날 오후 미 공군과 사단 제 17포병대대가 제 1사단 정면에 지원사격을 실시함으로서 적은 공세 행동을 하지 못하였

  다. 북한군 제 1사단은 9월 9일 19시에 팔공산 북쪽에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북한군은 제 1사단의 후방을 차단하고자 도덕산으로 침투시켰으나 제 15연대의 공격을 받고 격퇴되었다.

  한편 제 11연대 제 1대대는 사단 좌측에 대한 적의 압력이 증가되자 제거하기 위해 이날 새벽 파계재에서 고도현으로

  이동하여 적 1개 대대병력을 격퇴하였다.

  제 15연대 제 3대대 도 22시 적 1개 대대의 공격을 받았으나 치열한 교전 끝에 이를 격퇴하였다.

  이날 제 15연대는 연대지휘소를 매골로 이동하였고, 제 12연대도 연대지휘소를 왕산동으로 이동하였다. 

  북한군 제1사단장은 1200여명의 병력을 증원받아 도덕산으로부터 대구 동촌 비행장으로 진출하고자 기도하였으나

  제15연대와 제11연대가 10일 미명에 도덕산을 탈취하여 적의 기도를 분쇄하였다.

  이 무렵 북한군 제1사단은 3분의 2에 달하는 병력 손실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대구 진출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부터 이 지역에서의 전투는 소강상태를 유지하였다.

  12일 적의 특공대가 제15연대 지휘소가 있는 매골지역으로 침투하였으나 사전에 인지한 아군의 매복공격으로 격퇴하

  였다. 9월13일 제 11연대 제 1대대는 미 제1기병사단 제 8기병연대와 협동으로 756고지 부근에서 침투해 온 적을 포착

  하여 격퇴하였다. 583고지를 방어하던 제 15연대 제 1대대는 포병지원을 받은 적 1개 대대의 공격을 받고 일시 고지 동

  남쪽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진지를 점령하였다. 한편 제 1사단은 13일 12시부로 국군 제 2군단으로부터 미 제1군단의 지

  휘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현행작전은 계속 수행하였다. 제11연대 1대대는 적이 장악하고 있는 756고지를 야간에 기습

  공격을 하여 탈취하였다가 다시 적의 역습을 받고 빼앗겼다. 제 15연대 제 1대대는 14일 783고지를 공격하여 이날 19시

  30분에 점령하였다, 제11연대 제 1대대는 15일 미군 전폭기와 포병지원사격을 받으며 756고지를 다시 공격하여 이를

  점령한 후 추격전을 전개해 가산산성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북한군 제1사단의 대구 동촌비행장을 점령하려

  는 그들의 의도는 완전히 좌절되었다. 제1사단은 가산과 팔공산에서 적의 진출을 저지하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제1사단은 이 전투에서 북한군제1사단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어 재기불능상태로 만들었다.

  북한군 제1사단은 그들 병력의 3분의 2를 이 전투에서 피해를 입게 되었다.

  제1사단은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 이후 단행된 낙동강 방어선의 총반격명령에 따라 후퇴하는 적을 주격하기 시작하였

  다. 제 1사단은 팔공산 지역에서 적을 추격하여 가산 부근을 탈환한 후 다부동 지역의 미 제1기병사단과 협조하여

  9월 22일 이 지역에서 북진의 돌파구를 만들었다.

 

오계산 정상 가는길에

나무 밑으로 등로가 온통 파져 있다.

최근에 국군 전사자 유해 발굴한곳이라 여겨져 좀더 진행하니

곱게 차려진 재단처럼 꾸며진곳에 대형 태극기가 눈앞에 나타난다 .

순간 가슴이 뭉클해진다.

속으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리는 마음이었지만 함께 하는 분들도 계시기에 내색은 못하고 주위만 둘러 본다.

이곳 전투는 일명 볼링장 전투라고 불리우는 산아래 가산면 천평동 지역 미군의 화력부대를 지원하며 지키기 위해서

가산방면 국군1사단 11연대 병력이방어를 한것으로 보인다.

일행 먼저 가는걸 보고 잠시 고개 숙여 묵념하고

 

 

천평동 볼링장 전투

천평동 좌,우 능선의 협곡에 북한군과 미군이 쏘는 박격포와 대포소리가

볼링장 볼링공과 핀들이 서로 부딧히는 소리 같다고 해서 미군이 붙여 놓은 이름이다.

안동에서 대구로 이어지는 5번 국도변 천평에서 유학산 오르는 송학리-유학산 우측의 792봉과

석우리 297봉에서 가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볼링장 전투라 한다.

북한군 13사단과 천평동 좌측의 국군 1사단 11연대 1대대(500-800명) 천평동 우측의 1사단 15연대 2대대

그리고  천평동 새술막에서 진목정까지 미27연대 방어

그 치열했던 전쟁이 한달여간 진행된다.

좁은 협곡에서 미군과 적군이 주고받는 화력이 거대한 울림을 일으킨다는데 착안해서 미군 병사가 천평동 계곡에

적군은 미군의 화력이 워낙 강해 천평동 좌,우 산을 공격한것 같다.

그래서 좌,우 능선을 적군에 점령 다하면 우회로가 둟려 미군의 화력이 적군의 손에 들어 가는걸 지키기 위해서

더욱 치열하게 싸운것 같다.

실제로 이곳이 뚫렸다면 대한민국은 사라졌다.

1사단 사단장이 직접 권총을 들고 후퇴하는 국군을 설득해서 산으로 올라갔을 정도로

 

정상으로 부터 8부능선까지 온통 유해 발굴이다.

많은 전사자 분들이 이곳보다 더좋은 고향이나 국립묘지 호국원에 안장 되기를 바라며

 

다부동에서 기다리시는 악마 운영자님

지원 감사했구요 아침에 다시 만나야죠

 

유학산 839고지 정상에 안개비가 살짝 내린다.

유학산 전투중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곳이 동쪽 837고지이다. (위의 지도 참고)

비가 내릴것 같아 하산을 서 두른다.하산길에 도봉사 부터 비가 내리고

팥재 휴게소에 도착하니 본격적으로 비가 내리는데 피크닉 의자에 누워 비 그칠때까지 잠시 휴식을 하고

한시간 가량 비가 왔나 비 그치고 다시 출발한다.

호국산행길에 잠시 내린비는 우리를 쉬게 하고 맑은 하늘이 고개를 내민다. 

 

 

                다부동 전투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항 직후부터 반격으로 전환할 때까지 국군 제1사단이

  대구 북방의 왜관과 다부동 일대에서 제105전차사단으로 증강된 북한군 제2군단(제3, 13, 15사단)의 8월공세를

  27일간에 걸쳐 저지한 방어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1사단은 유학산과 다부동 일대에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북한군 3개 사단과 25일 동안의

  교전을 전개하여 북한군의 8월공세를 저지한 후, 미 제1기병사단에게 진지를 전개하고 신녕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따라서 다부동 전투는 1차 세계대전시 프랑스 수도의 관문으로 파리를 위기에서 구했던 베르덩(Verdun)

  전투에 비유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동양의 베르덩 전투라고도 한다.

  북한군의 8월공세시 주공부대의 목표는 당시 한국의 임시수도인 대구와 부산 교두보였다.

  적은 대구공격을 위해 투입된 5개 사단중 제1, 제13, 제15사단과 제105전차사단을 대구축선에 집중하였다.

  이에 대하여 아군은 3개 사단, 즉 중앙에 국군 제1사단(왜관-낙정리)을, 우측에 제6사단(낙정리-의성)을, 

  죄측에 미 제1기병사단(현풍-왜관)을 대구북방에 배치하였다. 제1사단은 7월 31일 미 제25사단의 엄호하에

  낙동강을 건너 새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그런데 8월 1일 마산이 위협받게 되고 미 제25사단이 그쪽으로 이동하게 됨에 따라 미 제25사단의 책임구역을

  제1사단이 맡게 되었다.

  1사단은 이 때부터 9일간에 걸쳐 낙동강 연안지구 방어전투에서 적 3개 사단과 맞서 적 사살 6,867명, 각종 포 23문,

  전차 파괴 10대 등의 전과를 올렸다.

  한편 육군은 8월 11일부로 그동안 계획중이던 축소된 방어선인 왜관 북방 303고지-다부동-군위-보현산을 잇는 선으로

  이동하여 적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따라 국군 제1사단이 강변전투를 종결짓고 12일 야간에 철수를 개시하여 다부동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방어선으로 이동하였다.

  제1사단의 다부동지역은 좌로는 328고지, 수암산과 유학산 일대의 횡격실 능선과 우로는 가산, 팔공산에서 뻗은

  고지군으로 둘러싸여 대구에 이르는 관문에 해당되는 전술상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었다.

  제1사단은 13일 다부동지역에 집결한 후 새로운 방어선을 점령하기 위하여 제15연대가 328고지일대,

  제12연대가 수암산과 유학산 일대로, 제11연대가 신주막일대의 계획된 진지로 진출하였다.

  적도 13일 제3사단 일부병력이 약목일대에서 도하하여 328고지로 공격하고, 제15사단이 국군 제1사단보다

  한발 앞서 유학산에 진출하였으며, 제13사단은 도로를 따라 신주막의 제11연대 정면으로 접근하면서

  일부병력을 우회시켜 미처 제11연대가 병력을 배치하지 못한 674고지를 선점하였다.

  이로써 국군 제1사단은 방어선의 중앙돌파와 다부동이 점령당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대구 정면의 적은 당초 '남한 해방'을 목표한 날인 8월 15일부터 다시 총공격을 재개하였다

  국군 제1사단은 제15연대가 328고지를 빼앗기고 뺏는 쟁탈전을 전개중이었고, 제12연대가 유학산을 탈환하기 위해

  공격을 반복하였으며 제11연대도 전차 7대를 앞세운 적 연대규모의 공격을 받아 복곡일대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처럼 대구 방면에서 적의 공세가 한창 전개되고 있을 때인 8월 16일 11:58∼12:24분에 대구전선의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유엔군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출격한 B-29 폭격기 98대가 왜관서북쪽 낙동강변일대 5.6×12㎞

  지역에 960t의 폭탄을 투하하였다.

  그러나 융단폭격에도 불구하고 16일에는 가산으로 침투하려는 적이 741고지에서 다부동 바로 서측 466고지를

  공격해옴으로써 국군 제1사단은 돌파되느냐 고수하느냐의 기로에서 놓여 있었다. 이에 제8군은 사단 병력만으로는

  방어선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8월 17일 군예비인 미 제25사단 제27연대를 다부동으로 투입하였다.

  18일 새벽에는 가산에서 침투한 일부의 적이 사격한 박격포탄이 대구역에 낙하하자 대구의 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 충격으로 이날 정부가 부산으로 이동하고 피난령이 하달되어 대구는 일대 혼란에 휩싸였으나, 조병옥 내무부 장관이

  경찰과 함께 직접 가두에 나서 피난령을 취소하고 민심을 수습함으로써 가까스로 질서가 회복되었다. 

  이와같은 위기를 타개하고 계획된 방어선을 회복하기 위하여 국군 제1사단은 18일에 지원된 미 제27연대와 협동으로

  적진돌파작전을 전개하였다. 미 제27연대는 대부동-돌머리 축선에서 전차중대를 도로상에, 보병 2개 대대를

  그 좌우 낮은 능선에 전개하여 보전협동으로 공격을 주도하고, 그 좌우 고지에서는 제1사단이 미군부대와 협조된 공격

  을 실시하였다.

  국군 제1사단 정면의 적도 전차를 새로이 보충받아 보·전협동으로 전면적인 야간공격을 개시함으로써

  피아간에 치열한 전투가 계속 되풀이 되었다. 제27연대는 천평 전방에서 3.5 로켓트포로 적전차 2대를 파괴하였으나

  적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적은 도로상의 지뢰로 인해 큰 진전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제15연대는 328고지에서 적과 수차

  례의 수류탄 공방전을 전개하면서 쟁탈전을 거듭하였고, 제12연대는 쌍방간에 많은 손실을 낸 채 19일 수암산을 재차

  피탈당하고 유학산 일대에서 밀고 밀리는 공반전을 반복하였으나 대체로 적의 돌파확대를 저지하고 있었다.

  이날 제8군명령에 따라 미제2사단 제23연대를 후방인 두전동에 배치하여 방어종심을 증가하였다.

  육군본부에서도 제8사단 제10연대를 제1사단에 배속시켜 가산일대에 배치하였다.

  이와같이 다부동의 전황은 국군 1개 연대와 미군 2개 연개가 지원될 만큼 위급하였다.

  그러나 20일 밤 적측에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적은 더이상 다부동전선을 돌파할 수 없다고 판단했음인지

  유학산 일대에 전개한 제15사단을 의성방면으로 이동시킨 후 국군 제8사단 정면 영천방면으로 공격하도록 임무를

  부여하였으며, 이로써 적은 제3사단 일부가 수암산 일대에, 제13사단이 유학산 우측면을 담당하게 되어

  공격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국군으로서는 당시 적 제1사단의 위협이 가중되어 다부동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을 때였으므로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8월 21일부터 국군 제1사단의 전황은 점차 호전되어 갔다. 이날 야간 특기할 것은 다부동 계곡에서 한국전쟁 최초로

  전차전이 전개되었다. 적은 전차와 자주포를 앞세워 조공을 제11연대로, 주공을 미제27연대 정면으로 지향하여 대규모

  야간역습을 감행하였다. 미 제27연대는 가용포를 총집중하여 적전차와 보병을 분리하고 아군전차를 추진하여

  적에 응사하였다.

  다부동 계곡에서 쌍방간에는 전차포에 의해 발사된 철갑탄이 5시간 동안이나 교차되면서 불꽃을 튀기었다.

  당시 이 광경을 바라보던 제27연대 장병들은, 불덩이의 철갑탄이 어둠을 뚫고 좁은 계곡의 도로를 따라 메아리치며

  상대방 전차를 파괴하기 위해 곧장 날아가는 모양이 마치 볼링 공이 맞은 편에 세워진 목표로 핀을 향하여

  재빠르게 미끄러져 가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볼링장(Bowling Alley)전투라고 하였다.

  더구나 다음날 오전에 적 제13사단 포병연대장(정복욱 중좌)이 제11연대지역으로 작전지도를 갖고 귀순함으로써

  적의 전투의지는 극도로 저하되었고, 그의 진술에 따라 유엔 전폭기 편대가 대거 출격하여 122㎜곡사포 7문과 76㎜

  곡사포 13문이 은폐되어 있는 적의 포진지와 집결지를 강타함으로써 적 제13사단의 화력지원을 무력화사켰다.

  제12연대는 그동안 8차례의 공격끝에 이날밤 최초로 야간기습을 시도하여 마침내 유학산 탈환에 성공하였다.

  제1사단은 마침내 주저항선을 안정시켜 작전의 주도권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미 제27연대는 

  증원임무에서 해제되어 마산의 모체부대로 복귀하였다.

  적은 전투력이 현저히 약화되어 거의 접촉을 단절하였으며, 귀순한 포병연대장의 증언에 의하면 제13사단은

  유학산에서만 1,500명이 전사상되고 총 3,000명의 손실을 입고 있었다.

  26일부터 제1사단은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방어진지를 미군에게 인계할 준비의 갖추면서 수색정찰을 강화하였다.

  또 28일에는 수암산을 피탈 10일만에 탈환하였다. 결국 제1사단은 8월 12일에 점령하게 되어 있던 방어선을

  16일 후에서야 점령한 결과가 되었다.

  제1사단은 방어선상의 가장 중요한 지형인 유학산을 적에게 선점당하여 그간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다부동 전선을

  방어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제1사단은 적 3개 사단의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328고지-수암산-유학산-741고지의

  방어선을 확보하고 다부동-대구 접근로를 방어하여 대구 고수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1사단은

  유학산과 다부동 일대에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북한군 3개 사단과 25일 동안의 교전을 전개하여 북한군의 8월공세를

  저지한 후, 미 제1기병사단에게 진지를 인계하고 신녕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결국 다부동 전투로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

  의 돌파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고,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은 공세 이전의 계기를 포착하여

  다른 유엔군 부대들과 함께 반격작전으로 이행하게 되었다.

 -백선엽 장군 회고록에서-

  우리 국군 1사단의 방어 전면에서 가장 넓은 지역을 전담했던 12연대가 이 유학산에서 혈투를 벌였다.

  1950년 8월 17일부터 항공과 포병의 지원을 받으면서 이들은 날이 밝으면 공격하고, 날이 어두워지면 또 공격을 했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12연대는 적이 먼저 고지에 오른 이 유학산을 남쪽에서 북쪽으로 치고 올라가는 식의 공세(攻勢)

  를 벌여야 했다. 고지를 선점한 적은 우리보다는 훨씬 유리한 지형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유학산 남사면(南斜面)은 매우 가파르다. 그에 비해 적들이 올라오는 북사면(北斜面)은 이보다 훨씬 완만한 지형을

  이루고 있었다. 고지에 오르기 위한 길의 평이함에서도 적은 우리보다 유리했다. 더구나 남쪽에서 정상을 향해 오르는

  길은 8부 능선까지는 비교적 쉬웠지만 그 이상은 험준한 암벽이었다. 몇 안 되는 등산로를 통하더라도 마지막에는

  50~70m의 가파른 암벽을 올라야 했다. 접근 자체가 쉽지 않아 고지를 빼앗으려는 12연대 장병의 큰 희생이 뒤따라야

  했다. 8월 13일 이후 유학산에서 격전이 벌어지면서 병력 손실이 계속 발생했다.

  그를 보충하기 위한 추가 병력과 탄약을 비롯한 보급품을 올려보내는 일은 통상 밤 10시30분을 지나서 시작, 11시30분

  쯤 마쳤다. 새 병력이 도착하면 소대장이 손전등으로 자신의 얼굴을 비추면서 “내가 소대장 아무개”라고 소개한 뒤

  중학교 졸업자 이상인 사람을 앞으로 나오게 해 분대장에 임명하는 식으로 공격 진형(陣形)을 갖췄다고 한다.
  소대장들은 화랑담배 껍질에 소대원 명단을 적어 간직했다. 소대장은 또 분대 단위로 대원들이 서로 성명을 확인하게

  한 뒤 먼저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동이 트면 시작하는 공격에 이들 분대원이 앞장을 섰다. 아침 전투에서 지난밤에

  보충된 신병의 80~90%가 사라지는 게 보통이었다. 그들의 이름을 적었던 소대장의 화랑담배 껍질은,

  그러나 없어지는 게 대부분이었다.

  설령 없어지지 않더라도 격전에 격전을 거듭했던 소대장의 땀과 피로 얼룩져 전선에서 죽어간 신병들의 이름을 끝내

  확인할 수 없었다. 무명(無名) 용사들은 그렇게 사라져갔다.
  12연대 1대대의 공격 목표는 유학산 제2봉인 837고지였다. 그곳에 이를 수 있는 능선은 3~4개에 불과했다.

  그러나 고지를 눈앞에 두고 멈춰 서게 되는 곳은 70m 이상의 암벽이 버티고 있는 지점이었다. 적으로부터 수류탄이

  날아오면 피할 곳도 없었다.
  3개 분대씩 일렬 종대로 목표에 다가가다가 적이 수류탄과 박격포로 공격하면 1개 분대가 그 자리에서 희생을 당한다.
  그러면 다시 뒤의 분대가 앞으로 나가는 식이었다. 나중에는 3개 중대 병력을 모두 합해도 100명이 채 안 될 정도로

  병력 손실이 생겨났다.모든 고지가 그랬다. 다부동 싸움의 모든 전장(戰場)도 그랬다.

  이런 때에 과감하게 나선 사람이 노무자였다. 병사들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던 노무자들은 조국과 민족, 그들의 가족과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전쟁의 또 다른 주역이었다.
  이들은 깊은 밤의 어둠을 틈타 조용히 아군이 있는 능선까지 접근해 탄약과 보급품을 날랐다.

  그러나 이들의 희생 또한 아주 컸다. 1대대장 한순화 소령은 “유학산 전투의 절반은 노무자들이 수행한 것이다.

  이들이 없었다면 다부동의 유학산 전투에서 아군이 결코 승리를 이룰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산에는 1사단 병사들의 시신이 쌓여 갔다. 새로 전쟁터에 투입된 신병들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시체 썩는 냄새에 그만 겁부터 집어먹고 주저앉기도 했다. 그들이 흘린 피는 계곡 아래로 내려가 물처럼 흘렀다.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그 피는 하천을 이루는 시산혈하(屍山血河)의 참혹한 정경이 나의 눈앞, 저 산에서 벌어지고 있

  었다. 유학산은 이렇게 내 전우들의 피와 육신을 삼켰다. 그 무덥던 1950년의 여름날, 밤과 낮 구별 없이 벌어지는 전투

  의 현장에서 내 부하들은 죽고 또 죽었다. 그러나 내가 있던 사단, 그리고 그 예하의 각 연대에서는 사정없이 ‘고지 탈

  환’의 명령을 내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득달같이 진지로 날아오는 공격명령을 받아들고 그들은 싸움터로 향했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그 명령을 따랐다.

 

안개로 가득한 유학산

피의 격전지 유학산이며 나라를 지킨 소중한 산이다.

 

328고지로 가는길

 

328고지로 가는길에 공장지대가 있어 좀더 둘러 가기로 하고 임도길을 찾아 오른다.

 

그대 이름은 328고지

 

328고지 정상으로 가는길에 임도길은 전사자의 길이다.

 

 

 

 

     328고지 전투

  12일간 주인이 15번이나 바뀐 328고지 전투와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던 837고지(칠곡 가산 학산리)

  탈환전 등 치열한 싸움을 벌인 다부동전투에서 아군은 1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적군은 1만7천500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1950년 8월 13일 북한군은 왜관 남쪽 기산면 노석리에서 도하를 시도하고 있던 제3사단 병력을 328고지 쪽으로

  돌려 집중 공격하였다.

  8월 12일 밤에 국군 제15연대는 연대 지휘소를 매남에 설치하고, 동명에서 부대 정비 중이던 제1대대를 포남리에

  위치한 328고지에 배정하고, 154고지를 방어 중이던 제3대대를 반계리에 위치한 270고지에 배정하였다.

  국군의 방어선 변경으로 인한 틈을 노려 북한군은 154고지를 차지하여 전진기지로 삼았다. 8월 14일 1시 무렵 북한군

  은 1개 연대 병력으로 북삼면 오평리 (현 북삼읍 오평리) 마진나루터의 수중 가도를 도하하여 328고지로 접근하여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다.

  공격을 막아내지 못한 국군은 고지 후사면으로 철수하였고, 북한군은 인접한 3대대의 270고지까지 점령하였다.

  중과부적으로고지를 빼앗긴 제15연대는 3~4시간 교육을 받은 신병을 보충병으로 부대를 재편해 다시 고지를 빼앗는

  1진 1퇴의 공방을 24일까지 지속하게 된다.

  날이 밝아지자 국군 제1·3대대는 북한군의 병력이 증원되기 전에 역습을 시도하여 오전 8시 무렵 고지를 다시 탈환하고

 고지의 전사면7~8부 능선까지 진출하였다.

  이때 국군은 낙동강 건너편에서 북한군을 지원하는 집중 포격이 가해지자 포격을 피해 고지의 후사면으로 철수한

  상태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465고지로 철수하였다.

  국군 제15연대는 철수와 동시에 특공대를 328고지 뒤쪽으로 침투시켜 두었다. 8월 15일 새벽 국군 제15연대 제1·3대대

  는 특공대와 함께 협공해 들어가 제1대대는 328고지, 제3대대는 270고지를 탈환하였다.

  오후 4시 무렵 미 공군기의 폭격으로 강 건너 언덕의 북한군을 제압하였고, 328고지에는 네이팜탄에 의한 북한군의

  시신이 널려 있었다. 이날 밤 11시 무렵 국군은 북한군의 재공격을 막다가 제1대대는 망정리로 후퇴하고, 270고지의

  제3대대는 465고지로 철수하였다.

  8월 16일 국군은 미 공군의 지원을 받으며 역습을 감행하였고, 미 공군은 B-29로 북한군에 대한 융단폭격을 가해

  북한군의 움직임을 크게 둔화시켰다. 그렇지만 북한군의 공격은 8월 17일에도 계속되었고, 8월 24일까지 피아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그 가운데 8월 23일 국군 제1대대는 미군 105밀리 곡사포의 지원 포격을 받으면서 다시 역습하여 270고지·328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과정에서 328고지에는 수습하지 못한 적군과 아군의 시신이 즐비했으며 전투 중에는 시신

  을 방패삼아 적과 교전을 하기도 했다.

  8월 24일 새벽 국군 제1·3대대는 여세를 몰아 154고지를 협공하자 북한군이 154고지를 버리고 369고지로 도주하였다.

  북한군에서 서울을 점령한 공을 찬양받아‘서울사단’이라 불리던 북한군 제3사단은 제15연대에 의해 거의 궤멸 상태에

  이르렀다.

  결국 328고지 전투는 고지의 정상이 15번이나 바뀔 정도로 지극히 치열하였다. 적 제3사단은 기간 중의 전투에서

  미 공군의 부단한 공중 폭격과 그리고 아군의 포격 하에서 328고지를 점령하고자 끈덕진 공격을 거의 일과와 같이 반복

  하였으나 도리어 막대한 손실만을 입게 되어 그 사기는 급하락을 면치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적은 제15사단이 영천 쪽으로 전진함으로써 전선이 넓어지고 보급의 지연과 탄약 등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지속된 공격행동을 못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적의 자랑이었던 전차도 미공군에 의하여 거의 파괴되었고 아군의 장비한 3.5인치 로케트포에 여지없이

  파괴됨으로써 전차지원 없는 싸움을 하게 되었다.

  반면 아군 제15연대는 2주일에 걸친 이른바 328고지전투에서 피비린내 나는 근접전투와 육박전을 통하여 일진일퇴의

  공방전 끝에 이를 사수하였던 것이다.

  비록 인적 손실이 많았다고는 하지만 아군 전선내의 요지를 담당하여 인접부대와 긴밀한 협조 하에 임무수행을

  완전히 끝 마치고 8월 30일부터 기동을 시작한 결과, 이날 5시에 대구, 하양을 거쳐 9시에 신덕동에 이동을 완료하였다

 

지나온 328고지

태극기 휘날리며 촬영 배경지 이며

이제부터 임도길

석적교 부터 낙동강 자전거 길이다.

 

왜관 전적 기념관

 

왜관 철교 앞에서 해바라기님과 악마님이 기다리신다.

이근에 식당도 많지만 해바라기님이 쌀밥에 고등어를 구워 오셨다.

자리깔고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1-2시간 쉬다가 진행 하기로 한다.

악마님께서 세줄이 오리지날 장날표 아디다스 딸딸이 사오시고

해바라기님은 그보다 더 좋은 별표 슬리퍼라며 하나 사오셨다.

 

왜관 철교

낙동강 전투 방어선의 중요한 지점이다.

 

이제부터 땡볕아래 잘익은 훈제요리 만드는 길이 기다린다.

인증담고 가는길에 왜관 시내에 들러 몇가지 물품 구입을 하기로 한다.

제가 신고있는 슬리퍼 어느 회사 제품인지 꼭 알고 싶은데

저 슬리퍼 신고 시맨트길 100km 걸음

이제 호국산행 후반전 시작이다.

해바라기님 악마님 지원 감사했습니다.

 

대형 마트에 들러 물,콜라. 아이스크림,모자 구입하고

 

폭염 주의보가 내렸지만 그 열기가 우리 앞은 못 막을듯

 

삐돌이 록수님과 같이

서로 다른 회사 제품인 딸딸이

언놈이 더 좋은지 아스팔트길에서 테스트

록수님 다리는 하얗고

 

자전거길 10km진행중 고마운 딸딸이 무릅에 올리고 귀하게 모시는중

그늘진 곳이지만 시맨트길 열기는 대단하다.

바닥은 뜨끈하게 보일러 틀고

앞뒤로 굴러 가면 잘 익히는중

 

낙동강 강바람에

어쩌구 하는 노래가 절로 생각나는 곳이다,.

지금은 4대강 사업으로 시원하고 걸죽한 녹초라때가 가득하고 

 

6.25당시 낙동강 방어선 상황도

워커라인 개념도이다.

1차 워커라인 낙동리에서 안동-영덕으로 이어진다가

2차 워커라인은 보현산-운제산- 기계-형산강으로 연결

 

멀리 칠봉지맥길의 의봉산이 고개를 내미는 강가풍경

강바람이 없어 뜨거운 열기가 오븐속의 닭고기처럼 잘 익어 간다.

 

성주대고 아래서 잠시 쉬면서 인근 점빵에 들러 아이스크림 사서 온다.

 

한여름 개팔자보다 더 부러운 모습이다.

삐돌이 록수님은 평상에 누워서 머 하는지

앉으면 자야하고 누우면 모기때문에 일어 서야 하고

 

일몰 담으시는 너머 대장님.

 

드디어 대구땅이다.

비오면 집으로 가면 되는데 덥기는 드럽게 덥다.

얼굴 보러 오신 갯강구 전임 지부장님. 수행중님. 꺼미님

모두 고마웠구요 감사했습니다.

 

사무진교를 지나고 달성보로 향한다.

 

어제 오후 1시부터 자전거길로 와서 이제 달성보 도착이다.

시맨트길 거의 60km진행

아직도 40km는 더가야 산길인데 발가락 몇몇곳에 생수가 저장중이다.

발뒤끝 부분에 생수 두통은 팔공산 오름길에 바늘로 찔러 실을 매달아 고통은 덜하지만 

 

이른 아침이라 아직 영업을 안하는 달성보 편의점

해뜨기전에 현풍으로 넘어 간다.

현풍 어느 식당에 들러 닭 한마리 잡아 도리탕이란 요리를 만들어 밥상에 올려 놓고

식사를 한다.

음식 맛은 좋은데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좌측은 왕령지맥길의 대니산이고 앞은 몇해전 전사자 유해 발굴한 곳이다.

대니산으로 바로 가면 6키로 정도 거리단축이 되지만 뜨거운 열기가 좋아 이길로 진행한다.

 

덥다 더워

그늘없는 임도길이 끝이 안보이니

 

앞은 도동서원이다.

세계문화 유산지정

앞으로 칠봉지맥길이 펼쳐진다.

 

정대장님.

 

오래된 은행 나무와 도동서원

 

잠시 구경 가시는 정대장님.

 

함께 고생했던 딸딸이는 마분지 종이처럼 얇게 눌려 버려 쿠션이라고는 눈꼽많큼도 없다.

구지면 농공단지 옆으로

우측으로 보이는 산줄기는 비슬지맥길에서 분기되는 왕령지맥길 능선이다.

좌측으로 금오지맥 속금산에서 이어지는 칠봉지맥길 능선이고

진행 하다가 망우당 곽재우 무덤 인근 동네 부페식당에 들러 식사를 하고

머리속까지 완전 익을판이다.

 

우리몸에 흐르는 피와 이글거리는 태양 어느게 더 뜨거운가

태양이 뜨거워도 몸속에 흐르는 피보다 덜 뜨거운것 같다.

지나는길에 시맨트 바닥의 열기로 발바닥이 녹아 내릴지경이다.

 

드디어 유어면에 도착 시맨트길 장장 100km를 걸어서 도착하니

야간에 가야할 산길 구진산 방향이다.

낙동강길 중에서 가장 폭이 넓은 지역이기도 한 유어면 낙동강 풍경

 

발가락에 생긴 자연산 생수 몇통은 바늘이 없어 칼로 수술을 시작한다.

칼로 찔러 물을 빼고 테이프로 방수 처리를 하니 걸음 걷기가 심히 불편하다.

비오면 집에 가야하는데 이놈의 중탈을 하려 해도 핑게 꺼리가 없어 절뚝이며 걷는다. 

대형 물집 7개

 

창녕군 유어면

유어면 어느 중국 식당에 함께 했던 딸딸이는 곰신 버리듯 버리고

 

 

 자료 참고 클릭하시면 원본 파일로

 

야간구간이라 지도로 정리

 

두곡지구 전투(클로버 전투지역)8월 7일-14일

자정이 지나자 적은 다시 4개 지점에서 일제히 도하를 개시하여 다음날(8월 7일) 새벽에는 최초 도하시와는 달리

<낙동강 돌출지역>내의 요지인 어봉리 능선과 두곡리 서편에서 북으로 뻗은 클로버잎 고지(△165)를 신속히

장악하고 말았다.

고지의 모양이 클로버 잎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으며 남북으로 4km나 뻗은 양지고개는 적이 이를 장악할

경우 9km 동쪽의 영산지역은 물론 하남(영산 동남 20km )에 이르는 미제24사단의 주보급로를 깊숙이 감제 관측할

수 있는 중요지형으로써 <낙동강 돌출지역>전투의 승패를 좌우하는 전술적 요충지였다.

8월 7일 아침, 제1대대는 이토록 중요한 양지(兩地) 고개를 탈환하기 위하여 다시 역습을 시도했으나 우세한 적의

병력과 지형적인 불리 그리고 혹심한 더위와 식수 부족 등으로 피해만 증대되어 갈 뿐 아무런 작전의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제1대대의 공격이 난관에 봉착되자 처치장군은 창녕에서 재편성중에 있는 제19연대를 투입하여 양개 고지의 탈환을

다시 시도해 보았으나 점차 증강일로에 있는 적을 격퇴할 수는 없었으며 아군의 피해는 증대되어 갔다. 8월 8일

제34연대의 병력은 1,000명선으로 제19연대는 1,700명선으로 감소되었고 사단의 전투력은 40%로 평가되고 있었다

 

남지읍 박진지구(돌출부)에서 넘어온 북한군 4사단 병력이 이곳 창녕읍 영산면 까지 와서 미군 제24사단.2사단

그리고 해병 5연대와 치열하게 싸운곳

멀리 영취산이 지척이다.

 

이곳 청단고개 일대는 북한군이 낙동강을 넘어 오면서 많은 전사자를 낸곳이다.

돌출부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곳이기도 하고 청단고개 넘어 이이목 나룻터다

북한군이 야간에 이이목 나루터 그곳을 헤엄쳐 건너 이곳 돌출부는 물론이거니와 영산까지 진행

미군과 치열한 교전을 한곳이다.

 

 

                  박진지구 전적비에서본 가야할 마루금

 

                       박진지구 전적비

 

                  박진전쟁 기념관에서

 

             박진 전쟁 기념관에서

 

        박진교에서본 북한군 진지 우봉지맥길 지역

          갓등산 방향

 

    좌측은 북한군 진지 지역

    우측으로는 미군 진지 지역

남지 박진전투 전적비에서

 

   전투 상황도

 

 

6.25전쟁 당시에 가장 치열했던 전투는 다부동전투 마산 전투산 전투(661고지).영천전투.안강-기계전투.

박진나루터 전투다.

박진지구전투(돌출부)는 1950년 8월 6일부터 10월 4일까지 박진나루가 있는 곳에서 벌어진 전투로, 미군 제2사단과

제24사단이 북한군 제4사단과의 치열한 전투

이곳이 무너지면 밀양과 부산은 물론 나라전체가 순식간에 점령당하는 최후의 보루인셈이다.

북한군의 시체가 낙동강물따라 사단병력이 떠내려간곳 이며 박진전투에 승리함으로써 아군이 낙동강을 건너

반격하게 되었으며 결국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과 함께 합록강까지 진격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남지지구 1차전투:50년 8월 6일  

인민군은 새벽 0시 시남리 이이목나루를 도하한 다음 시남 수개 고곡 등 산야에 은신하고

있었으므로  고곡을 거쳐 대곡까지 진출하려는 미군에게 맹렬한 사격으로 공격을 가하였다.

불의의 공격을 받은 미군은 많은 사상자만 내고 월하까지의 진출은 좌절되고 말았다.

(이때 인민군은 창녕을 향해 두 곳에서 낙동강 도하를 시도하였는데 이곳만 성공했던 것이다).

뗏목을 만들어 강을 건너기도 했으나 대부분 옷과 신발을 벗어 무기와 함께 똘똘 말아 머리위로 높이 이고 어깨까지

차는 강물을 건넜던 것이다. 이때 인민군 제4사단 제 16연대 주력 800여명이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시남리 고개를 넘어 안쪽으로 들어 왔는데 미 34연대 1대대가 시남리 청단고지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몰랐던 것이다.

미군은 이이목지점에 한명의 척후병도 내보내지 않아서 일어난 전투

 

 

북한군이 낙동강을 넘어온 창아지.영아지 마을이며 피난 가며 넘던 개비릿길 초입이다.

피난길에 이곳은 개 한마리가 겨우 지나가는 산길이라

그동안 가지고 오던 살림살이며 가축을 모두 버리고 지나간길

심지어 어린 아이까지도 버리고 갔다고 하는곳이다.

 

개비릿길 우측은 낙동강 절벽길이다.

안가보신분들 한번 가보시면 아주 좋습니다.

 

 

 

한낮의 개비릿길 풍경

 

개비릿길 대나무밭

 

개비릿길의 대나무밭

야간에 이곳을 지나면 무서움 마져 드는곳이다 주간에도 혼자 진행하면 머리뒷끝이 조금 그럴 정도로...

남지대교 옆에 마중오신 악마님 남지로 가서 통닭 한마리를 사오셨다.

닭다리 닭날개 몇조각 먹고 악마님 차에 실려있던 현수막을 몸에 둘둘말고 잠시 자려는데 강가 모기가 극성이다.

늦은밤에 오신 악마님 늘 고마운 클럽 운영자님이다.

 

남지대교

전쟁 당시 북한군이 민간인들 옷으로 갈아입고 남지 대교를 건너오자 미군이 포탄을 투하 다리가 끊어진다.

지금은 다시 복원해서 건널수 있음

 

용화사(능가사) 옆으로 올라 다음 길 이어간다.

밤새 가시밭으로 돌아 다니다가 이른아침에 대산면에 도착한다.

김밥집에 도착해서 밥을 시켜보니 맛은 별로고

아이스크림 두어개 먹고 출발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지점에서 치열하게 싸워이긴 경찰관 승전탑

 

전문 내용은 다음과 같음

 

악양루옆의 처녀 뱃사공 노래비

이곳도 6.25전쟁 교전장소이다 언젠가 이곳 고갯마루에도 승전탑이 자리할것 같고

 

낙동강 강바람에

치마폭을 스치니

군인간 오라버니

...

어제 오늘 낙동강 구경 잘하고

 

법수면 가는길에

더워도 너무 더워 저기 정자에서 잠시 쉬고 가기로 한다.

 

법수면

태극길 달기 70일 행사를 하는것 같다.

우리같이 발품 팔며 다니는 사람은 애국인가 아닌가

마을을 지나는 동안 폭염이라며 일사병 걸린다고 돌아 다니지 말라는 방송을 연신 들린다.

불볕 더위에 돌아 다니는 사람은 아무리 찾아봐도 우리뿐이다.

 

유현 슈퍼

이곳에서 아이스크림 몇개사고

잠시 그늘에 앉아 쉬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국토 종주 하느냐는 질문에

우리는 그런것 안하고 6,25전쟁 낙동강 방어선 찾아 다니는 산꾼이라 말을 한다.

국토종주와 6,25전쟁 호국산행길 어느게 더 값진 산길이 될지  

결론은 호국산행이라 말하고 싶다.

진행하는 동안 수많은 전사자 유해 발굴지역을 지나고 목숨바친 교전 장소를 지나지만

국토종주길에는 그런게 없다.

 

군북면에 들러 보스톤 대장님께 맛난 식사 대접을 받고 다음 산길 오른다.

군북면 지역 아스팔트길 반은 익어서 진행하니 뜨거운 피 마져도 더욱 끓게 만들고

 

661고지 (전투산)

원효암 뒷산이며 전투중에 아주 치열한 교전 장소이다.

오죽 했으면 산이름이 전투산이겠는가 

 

 

피아간 19번이나 뺏고 뱃긴 661고지 전투

남해 고속도로 옆 십이당산(삼봉산~마륜산 270고지),의상대 뒷산인 661고지(미군은 전투산이라 부름),여항산,서북산,야반산,옥녀봉 등

함안지방 남서쪽 산악지대에서 주로 인민군과 미군간에 교전이 있었다.
전투가 가장 치열한 지역은 661고지와 서북산 일대.남하하는 인민군에겐 낙동강 돌파 교두보이고 아군에겐 낙동강

방어 보루여서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전략요충지였다.
하루에도 몇 번 고지의 주인이 바뀐 이 전투는 9월하순까지 계속되다 결국 아군의 승리로 돌아갔지만 쌍방간에

수천명이 넘는 목숨을 잃었다.

 

 

전투산 아래서 잠시 콜라 마시며 오늘 마칠 산길 정리에 들어 간다.

모두가 뜨거운 심장을 지닌분들이고

한여름 이글거리는 뜨거운 태양 마져도 더욱 달군 산꾼들이다.

워커라인 실거리로 따진다면 340km를 욱박하는 거리지만

어느 한곳을 돌아가야 하고 빼먹고 가도 될 산길이라 편하게 320km로 하기로 한다. 

 

여항산 전투 개념도

 

여항산 정상에서 이제 최종 하산만 남겨둔상태다.

 

 전투산-여항산-서북산-인성산 전투

여항산은 함안의 진산이다. 또한 낙남정맥의 주산이기도 하다.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함안은 물이 역류하는 특이한지세다.

이런 역류지형을 바르게 하고자 훤히 트인 진동만이 함안까지 들어왔다면 천하 제일의 미항이 됐으리라고 여겼

다. 그러기에 배가 다닌다는 뜻으로 남을 여(餘) 배 항(航)자를 써서 여항산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여항산 일대는 최대의 격전지로 꼽을 만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다. 1950년 8월 들어 인민군 6사단은 주공격대상인

마산을 에워싸고 파상공세를 폈다. 이에 맞서 8월 14일 미 제25사단은 가야 서북쪽에 있는 십이당산에서부터 서쪽으로

여항산·필봉·서북산·야반산·옥녀봉을 잇는 능선에다 진지를 구축하고 반격에 나섰다. 이 고지들은 마산을 사수하는 최후

의 방어선이기도 했다.
25사단 24연대는 검안리 남쪽에서 서북산 북쪽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점유했다. 인민군 6사단은 두 차례에 걸친 전투끝

에 수많은 전사자와 군수품 손실로 치명타를 입고 말았다. 이로 인해 강제로 징집한 2000명에 이르는 의용군을 긴급히

보충했다 장비가 태부족인지라 전사자가 생기면 그 총을 회수해 전선에 투입하는데 급급했다.

이 때 어느 의용군의 일기에서는 ‘UN군의 포격과 공중공격은 몸서리치도록 무섭고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견디어야할

이 고난 … 몇 고개를 더 넘어야 마산인가·’라고 생사에 갈림길인 극한상황에 놓인 처지를 적어 놓았다.
미군 또한 험준한 서북산과 여항산 탈취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여항산 정상은 바로 전투 관측과 전방을 이용하

기에 적합한 고지였다. 특히 8월 15일 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은 명령 제82호를 하달했다. 그 중 한 대목을 보면 사기

를 진작시키는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유엔군 및 국방군에게 숨돌릴 사이를 주지 말고 새로운 방어선에서 진지를

구축할 여유를 주지 말라! 전력을 다해서 적을 혼란상태로 몰아 넣어 그들의 저항력을 격멸하고 그들의 장비를 파괴하

라! 유엔군 및 국방군에게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라! … ’고 독전했다.
이에 힘입어서인지 18일 밤 방호산 부대는 대대적인 집중 공격으로 나왔다. 3일간의 혈전으로 미군은 작전상 후퇴까지

했다. 무려 19회나 뺏고 뺏기는 백병전을 벌였다.

피아간 5천명 사망

 

이제 편하게 집으로 가야죠

고생한 산길 잊지 마시구요 앞으로도 후회없는 산길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산너머님과 함께한 시간중에서

42시간 최장 빗속을 걸음 했으며

호국산행 동서-남북

백두대간 5구간

그리고 이번이 마지막 산길이 된 워커라인 320km까지 그동안 진짜 고생 많이 하셨고

클럽 만들고 10년이 넘은 지금 수많은 산꾼을 만나서 교류 했지만 그분들 중에서도 최고의 남자라고 말하고 싶은분 

앞으로도 이런분은 만날수 없을것 같다

 

장거리 산행 이제 무거운 짐은 내려 놓고

당일산행만 하려고 한다.

최종 누적 산행거리 19,700km 2만 키로가 목표 였지만

생각해 보니 다 부질없는 숫자 놀음인것 같아 더이상 누적거리 계산은 안하기로 한다.

 

삐돌이 록수님

허구헌날 싸우는 절친이자 원수사이

이번에도 싸우고 말 안하고 그렇게 산길 지나다가 다시 말하고

그많큼 편하고 고생을 한 산우이다.

지금 낙동길 진행중이고 앞으로도 정맥길 가야할분

최장거리 300km를 세번하신 정통파 산꾼이며 오로지 지도와 선답자 자료만 들고 산길 가는분이다.

무거운짐 속에 많은 먹을것 어째 다드셨나

좀 주지도 않고

 

절친들 사이에서 감당못할 산길이어 오신 정명 대장님

발가락 물집으로 몇일간 고생 하셨고

절친들과 함께 하시려면 산행길에 콜라 엄청 드셔야 하는데

이번 산길에 콜라 많이 드셨죠

이제 시작이시니 경험을 바탕으로 종횡무진 누벼 보시기 바랍니다. 

아름다운 비행 기다립니다.

 

 

하루 해는 어느덧 우리 갈길에 따스함만 전해주고

말없이 제 갈길로 넘어 간다.

우리 역시 날머리에 설때까지 최선을 다하리라.

 

 

서북산 정상석

 

함께한 산우들

진정한 고생은 따로 있겠지만

산길을 지나는 동안 마음속의 뜨거웠던 심장으로 조국을 보고

목숨바친 호국영령분들께 감사하고 밟아본 호국산행길

6,25전쟁 전사자분들의 목숨과 바꾼 나라를 결코 잊지말고

세월이 많이 흘러 삶이 재미가 없을때 다같이 모여 다시한번 더 걸어 봤으면 

어설픈 방장 만나서 고생 많으셨습니다.

 

 

마지막 인성산에서

산길이 바람 같다고 해야하나.

해가 뜨는가 싶더니 하늘에 별이 반짝인다.

그러길 몇 차례 하더니 어느새 우리가 원하던 곳에 이렇게 서 있다.

바람이 앞에서

시간이 뒤에서

모든걸 달구어 버릴것 같은 태양이 저편으로 사라지고

그리운 집으로 가야할 시간

발걸음이 가볍고 몸이 가볍다.

간다.!사랑하는 가족이 기다리는 곳으로

 

 

인성산 정상에서 더이상 진행은 등로가 너무 엉망이고  날머리에서 기다리시는 분들로 인해

좀 더 좋은길로 빠르게 하산을 하기로 한다. 

하산길에본 둥근달은 첫날 보던 달과는 다르게 배가 많이 불러 더욱더 밝게 밤하늘에 걸려 산하를 비춘다.

마중오신 창원지부 분들과 친구 대진이 해바라기님을 만나고

산너머님과 같이 계곡에서 향기로운 땀내음이 배긴 몸을 씻고 날머리 장소로 향한다.

 

날머리 해병대 전적기념비 앞에서 씻고나니 사람같다.

여기서 길은 끝이 나지만 새로운 시작이기도 한곳

낙동강 최후의 방어전선 워커라인 코스를 좀더 수정 보완해서 국토 대장정 같은 명품 코스로 만들어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어디서 부터 다시 시작해서 어떻게 이어 붙여 볼까

또 다시 길위에서 길을 찾아야 하는시간

 

이번 산길에 태풍의 영향으로 전국이 비온다는 소식이 있었지만

맑은 하늘과 깨끗한 밤하늘

그리고 유학산 하산길에 잠시 내린 비는 호국 영령분들의 눈물이 아닌가

그 눈물 소리 없이 내릴때 호국산행 다니는 네남자 피할시간을 만들어 주고 2시간 가량 비가 내렸다.

그리고 다시 맑은날 연속

하늘이 도와준 날씨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번산길에 도움 주신

두령님.중부지부.수행중님.동강 할미꽃님.이쁜척 하쥐님.보스톤 대장님.유리 대장님.

오스칼 혜린님.겨울 나그네님.정다운님. 대진님.작은 악마님.해바라기님.갯강구님.꺼미님.

그리고 창원 지부장님과 지부분들 모두 감사 드립니다.

아름다운 산길에 같이 동행 해주신 정명님.산너머님.상록수님 함께해서 고맙다는 말대신에

우리가 걸어야 할 산길이라 수고의 말씀과 영광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지친몸 잘 추스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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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J3 CLUB
글쓴이 : 배병만 원글보기
메모 : 공부하기 하기 위해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