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워커라인 320km (폭염속에서 6일간의 흔적들)

2015. 8. 3. 09:51≪일반 산행지≫/훔친 남의 산행기

2015년7월25~30일(6일간 무박)

 

산행지:호국산행 워커라인

 

산행거리:320km   

 

산행시간:135시간35분 

 

함께 하신분:(존칭생략)

상록수.정명.배병만.산너머

 

 

낙동강 전투 최후의 방어선 워커라인 320km 

 

낙동강은 남한 제1의 大河로써 백두대간 삼수령에서 발원하여

 장장 525km를 흘러 부산 서쪽에서 남해 바다로 흘러들며

유역면적 2만 3천 평방 km를 자랑하는 강이다.

 

6.25 전쟁 기간중 50일만에 국토의 대부분을 힘없이 내준 대한민국

낙동강 방어선이 형성 되면서 국군은 방어선의 북측면(왜관-영덕 高山을 기준으로 담당)

미군은 방어선의 서측면 (왜관- 마산 진동리를 거쳐 진해만까지) 담당하게 된다.

 

낙동강 방어선은 목적상 더이상 허용할수 없는 최후의 보류이며

 저지선이기에 많은 국군 전사자가 목숨으로 지켜낸곳이다.

 

워커라인이란?

월튼 해리스 워커(Walton H. Walker: 1889~1950) 대장

워커 장군은 초대 미8군 사령관으로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남진하는 북한군을 낙동강 방어라인

마산-왜관-영덕 (워커라인 직선거리 240KM)을 구축하여  막아낸 인물이다.

 

"I will stay here to protect korea until my drath"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한국을 끝까지 지키겠다.)

 

낙동강 전선에서... (월튼 해리스 워커장군)

 

 

 워커라인 320km 걷기 위한 산행 1.2.3차

 

 1차 호국산행 2010년 6월5.6일

 

(다부동 방어선이 뚫렸다면 대한민국은 사라졌다.)

 

 33시간 함께하신분

 

(존칭생략 )배병만.가팔환초.일주.편한세상.훈아.

막창에소주한잔.현상.산너머

 

 2차 2011년 6월4~6일

 

71시간 함께 하신분

 

(존칭생략) 바랭이.후다닥.야생화.벽계수.현상.일주.

영화배우.중화기.상록수.배병만.산너머

 

 

 

 

3차 2012년1월4~7일

 

69시간40분 함께 하신분

 

(존칭생략) 배병만.산너머

 

 

24일 이른 아침 포항터미널 도착

오스칼혜린님 차량으로 포항여자고등학교에 있는

6.25전적비 잠시 들려 사진을 담고

장사해수욕장으로 향합니다.

 

 

 

 

먼길을 달려 장사해수욕장 도착

 

 

워커라인 320km 대장정 길을 떠나기 위해

단체사진 한장 담고

 

2015년 7월25일 06시30분

 6.25 전쟁의 흔적을 찾아 첫 걸음 을 시작 합니다.

 

 낙동강전선의 영웅 워커 장군 전사하다!

1950 12 23, 워커 장군은 경원축전에서 중공군과 맞서 방어전을 펼치던

 미 24사단과 영연방 27여단을 망문하기 위해 의정부 북방으로 출발하였다.

 

 후퇴작전 중에 큰 전과를 올린 미 제24사단에 대한 부대 표창과 미국 정부가 그 사단에서

 중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아들 샘 워커에게

수여한 은성무공훈장을 가슴에 직접 달아 주러 가던 중이었다.

 

오전 11시에 워커를 태운 지프가 현재의 도봉동 596-5번지 지점을 통과해

 의정부로 향할 때 반대편에서 남하하던 한국군 트럭과 정면으로 충돌하였고,

 이 사고로 그는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미군 당국은 한국에 있던 외아들 샘 워커 대위에게

아버지의 시신을 미국으로 운구토록 조치하였다.

 

그런데 워커 대위는 자신은 남아써 싸우겠다고 고집하여 결국

 유엔군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당시 도쿄 사령부로 샘 워커를 직접 불러

 워커 대위에게 운구지시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맥아더 사령관은 워커 장군이 사망하기 며칠 전에

 미국 정부에 그의 대장 진급을 상신해 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 워커 장군의 지프와 충돌한 국군의 스리쿼터 차량 모습.

▲ 방한한 콜린스 육군 참모총장에게 아들 샘 워커 대위를 소개하는 워커 미 제8군 사령관.

강골인 아버지처럼 전형적인 군인이던 샘 워커는 이후 최연소 미 육군 대장에 올랐고

이것은 아직까지 미군 역사상 부자가 대장에 오른 두 차례밖에 없는 귀중한 예가 되었다

한편 이승만 대통령이 워커 장군의 지프와 충돌사고를 일으킨

한국군 트럭 운전병을 사형시키려 했는데

미군 참모들이 적극 만류하여 가벼운 징역형으로 감형되었다고 한다.

▲ 낙동간전선의 영웅 워커 장군    

▲ 아버지의 뒤를 이어 훗날 미 육군 대장에 오른 샘 워커

 

워커는 방어선을 철옹성으로 만들고 신속하게 예비대를 투입하여 전투를 이끌어나갔다.

이를 내선방어라 부르는데,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정확한 정보 획득과 전투력의 신속한 집중이 필요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지휘관이 모든 결정은 신속히 해야 했다.

전장을 뛰어다니며 현장을 직접 파악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던

 워커는 누구보다도 빠르게 상황 판단을 하고 그때그때 지시를 내렸다.

열정적으로 전선을 순시하는 워커

 

특히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사수해야 하는 전투에서는

 한 번 물면 절대로 놓아주지 않는 그의 별명인

불독처럼 끝까지 버텨내도록 채근하고 지원했다.

 

 그가 불독으로 불리게 된 데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불독이라는 별명이 너무 잘 어울린다고 생각될 만큼

워커는 다부진 체격과 강인한 인상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공식적으로 그를 불독으로 부르게 된 것은

유명한 여성 종군기자 히긴스(Marguerite Higgins)와 관련이 있다.

맹렬 종군기자였던 마가렛 히긴스

 

당시 뉴욕헤럴드트리뷴의 동경 특파원이었던

 그녀는 한강다리가 폭파되는 장면을 생생히 목격하고 피난민들과 함께

 간신히 한강을 도강해 서울을 탈출했을 만큼 최전선에서 취재활동을 벌여

 여성 최초의 퓰리처상 수상자가 된 기념비적인 인물이었다.

 

원래 강철과 강철이 부딪치면 소리가 나듯 정력적인 야전 지휘관인

 워커와 극렬 여성 히긴스의 사이가 좋았을 리 없었다.

 

 편의시설이 없다는 구실로 히긴스를 한국에서 추방하였을 정도였다.

 

당시 히긴스가 워커를 묘사한 글이 있는데,

짜리몽땅하고 볼품없는 몸에다가 얼굴은 흡사 불독 같은 표정이었으며,

늘 삐딱한 태도를 보이는 인간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시작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워커=불독이라는 공식이 성립되었고

어느덧 계속 전해질 정도로 그를 대변하는 별명이 되었다.

 

이 때문에 그의 업적을 기려 1951년 미군이 새로 도입한 M41 경전차의 이름이

워커 불독(Walker Bulldog)으로 명명되었다.

워커의 이름으로 명명 된 M41 경전차

 

하지만 이런 평가와 달리 당시 미군과 가장 많이 합동작전을 펼쳤던

국군 1사단장 백선엽은 근엄한 얼굴에 불타는 기백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었다.

 

엄격하게 보였지만 말투는 부드러웠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그 무엇이 있었다.

특히 악수할 때 그의 손은 여인같이 부드러웠다.”고 회상했다.

 

이처럼 정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보니 어려웠던

시기를 신념을 가지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이었다.

워커를 배웅하는 백선엽 1사단장

 

맥아더가 현장까지 찾아가 진두지휘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난 3일 후인

918, 낙동강 교두보 안에서 결사적으로 방어전을 펼쳤던 아군들은

드디어 북진의 시동을 걸고 진지를 박차고 나와 앞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926일 미 8군의 선봉인 제1기병사단이 인천에 상륙해서 남진해

 내려오던 미 7사단과 오산에서 극적으로 조우함으로써

 38선 이남이 드디어 북한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북진 당시의 기갑연대 예하 기마대대의 모습

 

불과 열흘 만에 유엔군은 그동안 공산군에게 빼앗겼던 모든 지역을 회복하고

1950625일 이전의 상태로 전선을 돌려놓았다.

 

 이러한 급속한 전황의 반전에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이 결정타였지만

고군분투하며 적군을 막아낸 낙동강 방어전의 성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낙동강 방어선 돌파를 위해 공산군은 마지막 전력까지

모두 쏟아 부었으므로 인천상륙작전으로

배후를 급습 당하자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었던 것이었다.

맥아더는 전선을 둘로 나누어 북진을 개시하였다.

 

이제 전쟁은 현상고착을 원하는 워싱턴 정치가들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맥아더와 한국 정부의 의도대로 38선을 넘어 북한을 점령하는 통일전쟁으로 변했다.

 

아군 지상군을 대표하는 미 8군은 낙동강에서 참아내며 당했던 것을 돌려주기

 위해 북진을 준비했고 워커는 이런 감격적인 진격을 이끌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는 맥아더의 희한한 작전이 전개된다.

 

워커라인 320km 첫 정상

남산

태풍 할롤라 영향으로 많은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에 만만의 준비를 하고

여러가지 물품들로 가득찬 베낭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른다.

첫날의 날씨

 햇살은 따갑지만 그런대로

바람이 있어 산행하기는 좋은날이다.

마루금에 벗어나 있는 동대산

갈림길에 베낭을 두고 잠시 다녀온다..

배방장님.정명대장님

그동안 호국산행 많은 가시밭길을 함께 했고

오지게 고생 고생 했던 시간들이

어느덧 몇해를 넘기고

워커라인에서 다시 만난 두사내..

 

 

봉오리 하나 살짝 비켜 갈라다

상록수님과 잠시 알바를 하고 도착한 향로봉

 

 

내연산 수목원

매점에 들려 우동 한그릇 후다닥 헤치고

식수도 보충을 합니다.

땀께나 흘려야 오를수 있는 괘방산

성법령 가기전 상록수님과 또 잠깐의 알바를 하고

내려서니

겨울나그네님이 시원한 물회를 준비해 오셨다.

 

무지원이라 했는데

 이렇게 한마음으로 함께 하고픈 분들

소중한 마음이기에 그 정성 감사히 받으며

지원이니 무지원이니 별 의미를 가질 필요 없다고 생각해 보고..

시원한 물회에 시원한 음료수

대접 잘 받고 또 이여갑니다.

(겨울나그네님 고마웠습니다^^)

어느새 하루가 저물어 가고

가사령 도착

야간산행 준비를 하고

25일 첫날밤 산길을 보현기맥길로 접어들고.

낮에 시원하게 불어주던 바람은 밤이 되면서

사라지고 태풍 전야제 처럼 바람이 없고 고요한 산길

하염없이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밤길을 걸어갑니다.

 

 

 

 

기맥길이 그렇듯 그다지 좋지 않는 산길

어둠속에서 길찾기 쪼매 어렵지만

촉이 발달된 산꾼들과 함께 하니 길찾기 그리 어렵진 않습니다.

 

어둠속에서 보낸 보현길

꼭두방재에 내려서서 26일 두번째 아침을 맞이 합니다.

이른 아침이라 휴계소 문은 굳게 닫혀있고

방장님이 준비해 온 버너와 양은냄비로 라면을 끓여

아침을 해결 합니다.

장거리 산길에 라면 정도 먹을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감사한 한끼 식사..

아침 햇살 부터 뜨겁게 내리 쬐고

습도가 높은 산길 바람 없는 곳에서는 숨이 막힙니다...

 

꼭두방재에서 보현산까지

오늘 산행의 최고의 된비알들이다.

베틀봉 오름길 반 초죽음이 되고

 

 

이번이 네번째로 다가선 베틀봉 야간에 도착을 해서

보여지는건 없었는데

오늘 날은 무덥지만 시야는 좋습니다.

수 많은 대한의 산길들

저 산길을 언제나 다 밞아볼수 있을지

 

주르륵 주르륵 흐르는 땀은 멈출줄 모르고

이봉인가 싶으면 저봉이 기다리고

또 이봉인가 싶으면 저봉이 기다리고

몇개의 봉우리를 넘었을까 드뎌

베틀봉에 도착을 합니다.

보현산 아래

 지친 우리에게 힘을 실어 주실 분이 와서 기다리고 계신 다기에

두분을 먼저 보내고

상록수님 기다려 함게 갑니다.

오름길 힘들어 하시는 상록수님

면봉산에서 기다려 보지만 그늘 없는 면봉산

강력한 햇볕이 살갖을 태워 버리듯 잠시 머무름도 쉽지않아

셀카로 한장 담고 보현산을 향해 내려 섭니다.

면봉산 내림길에서 전에 보현지맥 할때 상록수님과 함께

알바를 했던 그곳에서 먼저 가신 두분도 션하게 알바를 하고

이미 도착해야할 두분 보현산 안부에서 만나

함께 오릅니다.

 

두번째로 힘을 실어주기 위해 오신

정다운님

시원한 음료에 미역오이냉국 갈증을 부르던 속을

달래준 음식이였습니다.

(정다운 고마웠습니다^^)

귀인 분들 때문에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다시 뙤악볕 속으로 ...

예전 밤에 통과 할때 세차게 불었던

바람은 어디로 가고

바람 한점 없는 보현산 뜨끈 뜨끈 따뜻합니다.

 

지나온 면봉산

 

 

노귀재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평상에 누워 30여분

휴식을 취하고

이제 팔공기맥 길로 접어 듭니다.

 

폭염 주의보 강력했던 햇볕은 어느덧 저물어 가고

26일 두번째 밤을 맞이 합니다.

야간에도 뜨거운 기운은 사그러 들지 않고

산속에서도 열대야는 계속 됩니다.

수기령

180km 호국산행때

원없이 마셨던 콜라.음료수 이번에도

원없이 마셔 됩니다.

 

갈증을 부르는 맘 달래려 넉넉하게 식수를 넣다보니

 베낭 무게는 줄지를 않고...

밤길 졸며 졸며 다가선 화산 능선에서

27일 세번째 아침을 맞이합니다.

 

 

 

유해발굴지

예고했던 비가 온다는 날

하지만 태풍은 우릴 비켜가고

빗님 대신 오늘도 강력한 햇살이 우릴 기다린다..

바람 없는 가시밭길속 지열이 긁혀 상처난 곳을 자극한다..

아~~따가버.. 

산길인지 밀림인지 길은 없고..

 

 

보통 굴토 작업은 가로 1m 세로 0.7m에

40~50cm 깊이로 파야하고

이렇게 두명이 1개조로 한나절을 파야 겨우 1구를 찾는다고 한다.

 2011년 기준 지금까지 찾지 못한 아군 전사자가 13만명

10년동안 발굴작업으로

전사자 유해 4698여구 수습

그중에 신원확인이된 전사자는 40여명 뿐이라고 합니다.

유해 발굴지

 오랜된 흔적을 말해주듯

낡아 버린 무명천 

 

우리가 걷는 이번 산길의 의미를 주는 현장이다..

 

이제 팔공산 라인이 시야에 들어오고

한겨울 팔공산 시루봉 오를적 생각에 잠기듯

팔공산 라인을 주시하고 있는 방장님

오늘 산행에 최고의 난이도이다..

갑령

방장님이 묻어둔 식수를 찾아 라면을 끓여 허기를 달래고

본격적인 더위 한판 승부 팔공산으로 진격한다..

여전히 힘든 시루봉 오름

두번 다시 안오리라 다짐 했었는데

 

한겨울 팔공기맥 비로봉 까지 마루금으로 가자해서

고생 고생했던 생각에 이번에는 도로로 갑시다...

부대 우회길 가시밭길 걱정을 했는데

잘 만들어진 테크 계단으로 어렵지 않게 비로봉으로

갈수 있어 얼마나 다행이던지...

요런길은 지자체에서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고..

예전에 부대 철조망 우회 산길 보다 1시간여를

빠르게 다가선 팔공산 비로봉

 

비로봉에 곱게 핀 나리꽃

화사한 빛으로 우릴 반긴다.

 

 

어둡기전에 한티재에 도착하기 위해

부지런히 갑니다.

매식 할수 있는 곳이기에

 

 

 

 

 

 

수없이 다녔던 산길이였을 팔공산

폭염속에 그길 쉽지만은 안은듯

 

 

 

연일 폭염으로 몸속에서 갈망하는 것은

마셔도 마셔도 끝없는 갈증이다.. 

 

 

세번째 반가운 귀인이 마중을 오셨습니다.

배방장님 깨복쟁이 친구 대진님

한티재 도착

대진님이 준비해 오신 치킨.튀김에 션한 갠맥주

그리고 사골국밥까지 후한 대접을 받고

(대진님 고마웠습니다.^^)

 

 

27일 세번째 밤을 맞이하며

가산을 향해 출발 합니다.

대구 시내의 야경

시원한 바람이 있는 곳에서 잠깐씩 쉬어거며..

 

 

가산

삼일 밤을 맞이하니 점점 얼굴이 헬숙해져 가고..

 

 

 

 

 

 

전에 없던 정상석

 

 

가산바위에서 대구시 야경

 

그 많던 가산바위 바람도 오늘은 없습니다.

쏟아지는 잠

이겨낼 재간이 없으니 잠시지만 넓은 가산바위 위에서

잠시 눈을 붙여 보지만

그 잠시를 못 견디게 모기란 놈들이 달라들어

바짝 마른 살갖 머 먹을게 있다고 물어대니

그 잠시 취침도 허럭하지 않은것 같아

금새 일어 납니다. 

 

유학산 방향을 바라보며 저기 까지 또 언제가나

유학산 그 까칠한 된비알은 어떻게 치고 올라가나

걱정 아닌 걱정이 되나보다..

 

 

오계산 근래에 유해발굴 현장

 

다부동 도착

네번째 귀인이 오시고

작은악마님 준비한 음식으로 든든히 속을 채우고

쏟아지는 잠 잠시 쉬어가 보려고 정자에 누었는데

방해꾼 모기 쐐끼들 또 달라드니 에구...

다부동 전쟁기념관 인증하고 유학산으로 오릅니다.

(작은악마님 이른 새벽에 고마웠습니다^^)

유학산

28일 네번째 아침을 맞이하고

부슬부슬 비가 오기 시작을 한다.

다행이 팥재에 내려서니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 퍼 붙기 시작한다.

 얼마나 많은 비가 올지.

굳게 닫힌 팥재 휴계소

잠시 비가 소강상태 오기까지 비를 피합니다.

 

쏟아지는 졸음 잠시 몸뚱이 눕히고 싶지만

모기란 몸 때문에

이렇게 앉아서

꾸벅꾸벅

1시간 여를 이렇게 보내고

비가 잦아듣니 다시금 길을 나섭니다.

오늘은 비가 와서 시원 할래나..

잠시 내린 빗물땜시 습도만 높여놓고..

오늘도 여전히 폭염이다.

땀 범벅 이제

차리리 비가 왔으면

 

 

 

새롭게 조성되는 왜관지구 전적기념관

이 뜨거운 날에도 공사가 한창 입니다.

 

드뎌 1구간 왜관철교 도착

175km지점

 4일을 밤낮으로 걸어왔습니다.

다섯번째 반가운 귀인 기다리고 있습니다.

해바라기님.작은악마님

이것저것 맛깔스런 반찬에 고등어 까지 구워 오신 정성

감동이였습니다.

첫 만남을 이렇게...

(해바라기님 고마웠습니다.^^)

뜨거운 태양을 피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본격적인 낙동강 자전거길 100km 행군을 시작 합니다.

 

37도가 넘는 폭염에 땅바닥 지열을 발바닥 전체에

감지가 되니 등산화속 열기 또한 복병이다.

그 등산화 속 열기를 달래기 위해

두분은 그 유명한 세줄 쓰레빠 싣고 강행군...

 

 

 

 

그늘 한점 없는 낙동강 자전거길

자꾸만 지처만 가고 바람없는 길이지만

큰나무 그늘이라도 있으면 이렇게 잠시

뜨거운 태양을 피해봅니다..

온 몸에는 4일간 찌든 쉰내가 풍기고

살갖은 점점 타 들어가듯

구리빛 잘 읽어가는 통닭 신세

 

쓰레빠 행군...

서로 다른 생각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

두사람의 친구가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가야 할 길은 멀고도 아득했습니다.

목적지까지

가려면 높은 산과 강과 골짜기도 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길을 걷던 한 친구가 말했습니다.

갈 길이 아직도 멀지만 하늘을 바라보면서 가노라면

더 빨리 목적지에 닿을 수 있을 거야"..

 

그러자 다른 친구가 밀했습니다.

길은 땅에 있어...

땅을 보면서 걸어가야 해.

하늘을 본다고 길이 보여..?

그러자 친구가 발끈하며 대답을했습니다.

하늘을 보면서가야 할 방향을  알 수 있지.

나는 하늘을 보고 갈 거야."

 

그러자 다른 친구도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땅을 봐야 길을 찾을 수 있지..

나는 땅을 보면서 갈테야."" 

이렇게 두 친구는 서로 자신들의 생각만 주장하다

결국 각자의 길로 따로 가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서로의 생각을

인정할 줄 모르면

그 우정은 앝은 얼음과 같습니다.

 

금방이라도 쩍쩍 금이 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친구란 볼트와 너트 같은 관계입니다.

 

늘 옆에 함께하는 친구가 있다면 배려하고

아껴 주어야 하며

우정은 시간이 만드는 게 아니라

 

"친구란 무엇인가?

두 개의 몸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다...."

 

 

낙동길에 뉘었뉘었 하루해가 저물어 가고

5일째 밤을 준비 합니다.

 

 

강정고령보 불빛이 밝혀지고

저기에 또 반가운 분들이 기다리고 계시다니

부지런히 갑니다..

 

 

 

 

강정고령보에 도착을 하고

여섯번째 반가운 귀인 분들이 오셨습니다.

 

(갯강구님.수행중님.꺼미님.작은악마님.)

 

뙤약볕에서의 낙동길 강행군에 지쳐 있는 심신

정성스럽게 준비해 오신 음식으로 심신을 달래고

한참을 쉬었다가 다시금 그 끝없는 낙동길을 이여 갑니다.

 

(갯강구님,수행중님,꺼미님.작은악마님. 고마웠습니다^^)

밤새 졸며졸며 후덥지근한 강바람을 맞으며

걷고걷고

가시에 찌른듯 콕콕 쑤시는 발바닥 고통이

자꾸 뇌를 자극한다.

어느덧 30일 6일째 아침을 맞이하고..

 

달성보 도착

온몸에 찌든때는 못 씻어도 아침이 밝았으니

 세수 정도는 하고 가는 센스..ㅎㅎ

그렇다고 누가 봐 주는 사람도 없는데...

 

 

어제에 이여 100km 낙동강 자전거길 이여 갑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저길.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얼마나 부러운지...

 

오믈도 여전히 폭염속

마을을 지날때면 확성기에서

이장님이 목소리가 들립니다.

37도 폭염 주의보가 내려 졌으니

나이 드신분들 심장이 약하신 분들

바같 출입을 삼가 해 주시길 바랍니다.

 

연일 폭염이 이여지니 그럴만도 하다.

 

하지만 우리 네명은 독하기는 하나 보나

그늘 하나 없는 콘크리트 자전거길

이 무더운 폭염속에서도 더위 먹지 않고 꿋꿋히 걷고 있으니

 

산토끼 마을도 지나고..

 

가도가도 끝이 없는 이길을 쳐다보면

그자리에 맴돌듯 가끔 정신이 몽롱해 진다.

 

 

낙남길을 만나기 위해 6일째 밤을 맞이하고..

밤새 길도 없는 동네 뒷산 가시밭길에

헤메고 헤메고 돌아다니다

다시금 도로를 만나 걷고

한 고개 넘어 또 다시 산길로... 

비몽사몽 이제는 내가 걷는 걸음이 아니다.

나도 모르게 그저 끝을 향해 몸이 반응 할뿐..

늦은 저녁 남지 도착

작은악마님이 어둠을 밝히면 기다리고 있는다..

우리도 통닭 신세지만 잘 익은 통닭 배달 시켜

션한 맥주로 갈증 을 해소하고

잠시 취침 모기밥 실컷 주고

남지 철교를 건넙니다.

 

한겨울 이곳 똥바람을 맞으며 배방장님과 걷던 생각이 나는데

오늘은 바람은 커녕 불빛 마져 뜨거움을 준다..

 

이제 지칠때로 지쳐으니 알바는 죽음이다.

갈림길 꼼꼼이 체크하고..

 

용화산

 

6일째 아침을 맞이하며

여항산을 향해 힘을 내여 봅니다.

오늘도 여지 없이 폭염과 함께

삶에 길엔 지도가 없다.

아무도 삶의 지도를 가진이는 없다.

 

방황없이 달리는 우리네 삶은

삶의,지도가 없기 때문에

우왕좌왕 헤메고 넘어지고 깨어지고 한다.

 

다만 그삶의지도는

경험으로만 터득될수 있는것이다.

그러나 터득했다고 해서

다른사람에게 적용되는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한사람에게만

적용되는 일회용 삶의 지도이다.

만약 누군가,먼저,살아서

터득한 삶의 지도가 만인에게 적용되는 것이라면

우리의 인생은 오류라는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희노애락이

존재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삶의 가치성도 저 나락으로 추락할 것이다.

남에게 끌려달리는 걸음,

억지로 남을 앞지르려는 걸음,

마지못해 걷는 걸음,

도망치는 걸음,

목적지를 분명히 알고,

그곳을 향하여 자신의 속도로 걷는 것,

그게 진짜 걸음인 것이다.

이른 아침 대산면 도착을 해서

문연 밥집찾아 삼만리

겨우 찾아낸 김밥집에서

밤새 허기진 배를 채우고.... 

6.25 경찰 격전지 기념탑

 

 

 

 

 

 

 

 

 

 

비료 비닐 포장으로 부채를 만들어 여유있는 배방장님

 이번 워커라인 선물이라면서

나도 하나 건네 주네요..

320km선물치곤 쪼매 그렇지요.ㅎㅎ

 처녀뱃사공 기념탑도 둘러보고

누가 노래 한소절 불러주면 좋으련만

모두가 아마도 음치인듯 조용하고..

한낮에 달궈진 도로를 피해 마을 정자에 쉬면서

발바닥 상태 점검중

 

물집이 수습중

물집 터뜨려 테이핑으로 감고..

이 사람은 메스로 직접 수술까지

고통을 즐기는 한사람

 배??씨

폭염속에서 고통들

수 없이 길바닥에 십원짜리 뿌리며

마음속 갈등이 나를 괴롭히기도 한다.

 

힘드니까 여기까지 하자.

나를 다독이며 하는 말...

그래,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 뭐...

나를 설득하며하는 말...

그런데 여기서 멈추는 것 "이 정말

최선인걸까?

우물쭈물하고 있는 나...

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 나...

비정상인가요?...

수 많은 갈등 속에서 포기하는 유혹을 견디며

6일 밤낮을 걷다보니

끝이 보이기 시작 합니다.

 

마지막 퇴악볕 함안 도착을 하니

 일곱번째 반가운 귀인 헤이보스턴 대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된장 샤부샤부로 근사한 점심을 대접 받고.

그 기력으로 힘을 내여 여항산을 향해 갑니다.

 

(헤이보스턴 대장님 고마웠습니다.^^)

 

전투산

19번이나 뺏고빼앗긴 661고지 전투

밤에는 미군이 낮에는 북한군이..

 

피아간 19번이나 뺏고 뱃긴 661고지 전투

십이당산(삼봉산~마륜산 270고지),의상대 뒷산인 661고지

(미군은 전투산이라 부름),여항산,서북산,야반산,옥녀봉 등

함안지방 남서쪽 산악지대에서 주로 인민군과 미군간에 교전이 있었다.
전투가 가장 치열한 지역은 661고지와 서북산 일대.

남하하는 인민군에겐 낙동강 돌파 교두보이고 아군에겐 낙동강

방어 보루여서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전략요충지였다.
하루에도 몇 번 고지의 주인이 바뀐 이 전투는

 9월하순까지 계속되다 결국 아군의 승리로 돌아갔지만 쌍방간에

수천명이 넘는 목숨을 잃었다

이제 끝이 보이지만

 몸은 맘 같이 움직여 주지 않고..

핸섬했던 얼굴들이 6일간에 행군으로

 점점 헬숙해 지고

 

 

 

 

유해발굴 했던 흔적

꼭 다시오마 흔적을 남긴곳 이렇게 전우의시체를 나무밑에 묻어두고...

미군은 6.25전쟁시 한강으로 추락해 숨진 유해를 찾기 위해

 한강 밑바닥까지 샅샅이 뒤져 감동을 준적이 있으며, 특히

미군전쟁포로 및 실종자 확인 합동사령부에 유해발굴단(JPAC)을 창설해

 ‘조국은 당신을 영원히 잊지 않는다’라는 구호

아래 지구촌 어디라도 유해를 찾아 나서고 있다.

 

미국은 나라를 위해 헌신한 자국민이면 끝까지 국가 차원에서 책임진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미국은 지난 2003년 10월 JPAC(합동전쟁포로 및 실종자확인사령부)

를 창설했지만, 이미 1973년부터 유해 발굴 작업을 해왔다.

그러면서 ‘조국은 당신을 잊지 않는다

(You are not forgotten)’ ‘그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Until they are home)’를 모토로 내세웠다.

참고: 한국은 전사자 유해 발굴 10% 미만수준

 

 

 

 

여항산군 주봉답게 위풍당당한 이 함안 최고의 진산.

 여항산은 그러나 낯설은 별칭을 가진 가슴 아픈산이다.

일명 상데미 또는 갓데미산.한국전쟁 당시

 미군 병사들이 갓댐 이라는 저주의 말을

 내뱉은 낙동강 전투 최후의 방어선

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이 얼룩져 있는 산하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너무나 몸서리쳐지고

 지긋지긋했던 나머지 신의 저주를 받으라는 뜻으로

 ‘갓 뎀(God deme)’산이라

고 내뱉기 일쑤였다.

이 말이 갓데미로 변해 널리 통용되다 보니

오늘날까지 여항산의 별칭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여항산은 함안의 진산이다.

 또한 낙남정맥의 주산이기도 하다.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함안은 물이 역류하는 특이한지세다.

이런 역류지형을 바르게 하고자 훤히 트인 진동만이

 함안까지 들어왔다면 천하 제일의 미항이 됐으리라고 여겼다.

 

그러기에 배가 다닌다는 뜻으로 남을

 여(餘) 배 항(航)자를 써서 여항산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여항산 일대는 최대의 격전지로 꼽을 만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다.

1950년 8월 들어 인민군 6사단은 주공격대상인

마산을 에워싸고 파상공세를 폈다.

이에 맞서 8월 14일 미 제25사단은 가야 서북쪽에 있는

 십이당산에서부터 서쪽으로

여항산·필봉·서북산·야반산·옥녀봉을 잇는

 능선에다 진지를 구축하고 반격에 나섰다.

 

이 고지들은 마산을 사수하는 최후

의 방어선이기도 했다.


25사단 24연대는 검안리 남쪽에서 서북산 북쪽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점유했다.

 인민군 6사단은 두 차례에 걸친 전투끝

에 수많은 전사자와 군수품 손실로 치명타를 입고 말았다.

이로 인해 강제로 징집한 2000명에 이르는 의용군을 긴급히

보충했다 장비가 태부족인지라 전사자가 생기면

 그 총을 회수해 전선에 투입하는데 급급했다.

 

이 때 어느 의용군의 일기에서는 ‘UN군의 포격과 공중공격은

 몸서리치도록 무섭고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견디어야할

이 고난 … 몇 고개를 더 넘어야 마산인가·’라고 생사에 갈림길인

 극한상황에 놓인 처지를 적어 놓았다.


미군 또한 험준한 서북산과 여항산 탈취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여항산 정상은 바로 전투 관측과 전방을 이용하기에

적합한 고지였다.

 

 특히 8월 15일 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은 명령 제82호를 하달했다.

 그 중 한 대목을 보면 사기

를 진작시키는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유엔군 및 국방군에게 숨돌릴 사이를 주지 말고

 새로운 방어선에서 진지를

구축할 여유를 주지 말라!

전력을 다해서 적을 혼란상태로 몰아 넣어 그들의 저항력을 격멸하고

 그들의 장비를 파괴하라!

 유엔군 및 국방군에게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라! … ’고 독전했다.
이에 힘입어서인지 18일 밤 방호산 부대는 대대적인 집중 공격으로 나왔다.

 

3일간의 혈전으로 미군은 작전상 후퇴까지

했다. 무려 19회나 뺏고 뺏기는 백병전을 벌였다.

피아간 5천명 사망

 

 

 

 

 

 

 

 

 

 

 

 

 

인성산 이제 하산만 하면 됩니다..

7일째 밤을 겨우 모면하고

날머리

해병대 진동리 지구 전첩비

7월30일 목요일 21시35분

 

워커라인 320km

산행시간:135시간35분

 6일간의 대장정 마무리 합니다.

 

 

배방장님▽

그동안 호국산행을 위해 수없이 답사를 다니고

자료를 수집하신 배방장님

자기가 만든 코스 꼭 완성하리라 다짐했던 그 산길

함께해서 영광이였습니다.

정명대장님▽

초장거리 첫 출전을 하셨는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흐트러짐 없이 걷는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6일간 시간들 오래 기억되리라 믿으며 수고 하셨고

완주를 축하드립니다,^^

상록수님▽

몇개월 못본 산친구

대장정 워커라인에서 다시 볼수 있어서

행복한 걸음이였습니다.

묵묵히 꾸준히 걷는 걸음에 늘 날머리에 함께

있는 모습들 당연한것 임에도 늘 대단하는 생각입니다.

앞으로 새로운 산길에 자주 뵙길 바라며

6일간의 산정 또 한번 느끼고 감사 했습니다^^

산너머

신가팔환초를 시작으로 호국길에 배방장님과 함께

 수없이 많이 걸어 보았던 산길과 시간들

유명한 코스 산행 보다는 인기가 없고

관심도 저조한 가운데에서도

꿋꿋히 호국길을 알리고 그런길이 있구나 잠시라도 알리고자

노력을 해왔던 시간들이 주마등 처럼 스쳐 지나 갑니다.

한민족이 6.25 전쟁을 치르고 뼈아픈 상처와

돌이킬 수 없는 많은 희생의 결과가

결국은 남과 북이라는 두동강이 되어버린 우리나라 국토

그 숨막히도록 치열했던 전쟁에 흔적들

그리고 아직도 밝은 빛을 못보고 잠들어 있는 호국영령분들

전우에 시체를 넘고 넘어

같은 민족끼리 총 칼을 견우며 몆날 몇일을 그 어둠에 산속에서

언제 죽을 지 모르는 극박함 속에서 지내야 했던 시간들

 

우리가 잠시 고통으로 6일간 걸어보며 느껴보리라

했던 산행이지만 과연 그분들에 심정을 조금이라도

이해를 하며 걸었는지 내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앞으로는 절대 있어서는 안될 전쟁

그리고 무고한 희생이 없길 바라고

아직도 어둠속에 계시는 호국영령분들 유해가 많이 발굴되여

밝은곳에 안장 되시길 바래봅니다..

6일간 함께 걱정해 주시고 마음으로 함께 걸어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고맙다는 말 전합니다..

 

정성스럽게 준비해 오신 따뜻한 한끼 식사가

우리가 여기까지 올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산정에서 만난 귀인 분들 한분 한분 감사드리며

 

날머리에서 환영해 주신 창원지부

대경지부 늦은시간 까지 기다려 주시고

맛난 뒤풀이 까지 넘 감사 했습니다.

 

함께 해 주셨던 클럽 모든 분들 사랑합니다.^^

부디 먼 훗날~~나 가고 슬퍼 하는 이~
내 슬픔 속에도~
행복했다~!~~~~~~~~~ 믿게 해~~~~

출처 : J3 CLUB
글쓴이 : 산너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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